![]() |
남재일 (경북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한 신문사 시민기자 교육 과정에서 시민저널리즘을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50명 남짓한 수강생을 대상으로 "시민과 국민 둘 중 어느 단어에 더 끌리느냐?" 질문을 던졌다. 국민을 선택한 비율이 80% 정도 됐다. 이유를 물었다. 지목한 수강생 대부분이 명쾌하게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가운데 한 수강생이 선이 분명한 답변을 했다. "시민(city people)은 그냥 한 도시에 소속되는 것 같은데 국민(nation people)이라 그러면 국가에 소속되니까요." 수강생 상당수가 이 답변에 맞장구를 쳤다. 국민과 시민의 차이는 단지 어디에 소속되느냐의 문제이고, 이왕이면 크고 강한 보호막을 갖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애초에 이 질문을 던진 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능동적 감시를 추구하는 시민저널리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시민기자 자원자이니 국가권력의 통치 대상인 '국민'보다 국가권력을 창출한 주권자의 자리인 '시민(citizen)'에 더 친화적일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수강생들은 명분뿐인 주권자의 자리보다 생존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는 '국민'을 선택했다. 어떤 추상적 가치보다 생존의 유불리에 우선으로 반응하고 행동한 것이다. 시민기자들의 의식이 이 정도면 전체 인구의 평균적 인식이 어떨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사회는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생존을 특권화하는 논리가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 왔다. 지난 세기의 험난한 역사와 분단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생존에 집착하는 사회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기회를 놓친다. 생존은 그 자체로 타자와 연대해서 가꾸는 미래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타자를 무차별적으로 적대하는 자기보존의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된 한 드라마는 한국사회를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표현했다. 생존이 특권화된 사회를 이보다 더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은가. 현재 대한민국은 국제무대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단군 이래 최전성기를 누리는데 정작 국민은 생존투쟁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생존 자체는 못 가진 자들에게 더 절박하지만 생존의 논리를 앞장서 강변하는 이들은 대개 가진 자들이다.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해 안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니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는 그다음에 하자는 식이다. 현재의 위기를 과장해 '우리 모두의 생존'을 당면한 현실로 만들면 생존이 절박한 소수자와 취약계층의 목소리는 오히려 묻힌다. 생존이 절박한 자들의 생존권 요구에 편승(나도 살기 힘들어!)하면서 정작 실체가 있는 생존권 요구를 지우는 것이다. 더 많이 갖기 위한 경쟁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경쟁에 불리한 자들의 존재를 축소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생존'을 강조하는 진짜 이유다. '우리 모두'는 거기에 얼마나 공모하고 있을까.
진정 누군가의 생존을 염려한다면 '우리 모두의 생존'이란 프레임은 버려야 한다. 대신 '우리 모두의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소수자와 취약계층 '그들의 생존'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사회는 부당한 핍박에 저항하는 소수자, 피해자, 사회적 약자들이 인정투쟁 과정 속에서 호출하는 공공선에 나머지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연대할 때만 비로소 역사적으로 한걸음 더 진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북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