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서문시장 백년의 발자취 (2)…혼수 장만 전국적 명성·정치 1번지·부자 발상지…'대구 소울푸드' 주도

  • 홍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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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10  |  수정 2023-03-10 08:33  |  발행일 2023-03-10 제34면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서문시장 백년의 발자취 (2)…혼수 장만 전국적 명성·정치 1번지·부자 발상지…대구 소울푸드 주도
서문시장으로 떠나는 한국전통놀이 글로벌 파티에 참가한 외국인 유랑단이 어묵과 만두를 먹고 있다. 〈영남일보 DB〉

서민 일상과 함께하다
전국 최대 규모 포목·주단 도소매 형성
화재 17회 발생…2005·2016년 큰 피해
박근혜 前 대통령 정치 고비마다 방문

◇…서문시장은 6·25전쟁이 끝난 후 특수경기를 맞아 대구와 인근의 직물공업을 배경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포목과 주단 도소매시장이 형성됐다. 서문시장의 매매 규모는 1950년대 당시 대구시 15개 시장 총거래액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대구 경제의 핵심이었다. 1950년대 대구는 우리나라 면방직 공업의 중심 생산지였고, 1960년대에는 섬유공업 도시로의 명성을 키웠다. 결혼 계절이 오면 서문시장에는 혼수 장만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1960년대 말까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삼남지방의 상권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실제로 서문시장의 섬유 거래량은 전국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났다.

1970년대 이후 쇠퇴기를 걷고 있기는 하지만 도매기능 중심으로 전국적인 원단(주단·포목 등) 시장 이미지를 가진 서문시장은 3만5천㎡ 면적에 1·2·4·5지구와 동산상가, 건어물상가, 명품프라자 등 8개 지구로 구성돼 있다. 총점포는 4천540여 개에 1만2천여 명의 상인이 하루 평균 4만5천여 명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서문시장 백년의 발자취 (2)…혼수 장만 전국적 명성·정치 1번지·부자 발상지…대구 소울푸드 주도

하지만 서문시장은 100년의 역사 동안 많은 화재와 싸워야 했다. 서문시장은 1923년에 개설된 이래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했다. 기록된 화재만 무려 17회. 1952년 2월24일 점포 4천200개가 전소된 대화재를 시작으로 1960년, 1967년, 1975년에도 큰 화재가 발생했으며, 2005년과 2016년에도 화재가 발생해 막대한 피해를 남기기도 했다.

서문시장은 경제적인 부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징성을 키우고 있다. 대구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1순위로 서문시장을 찾고 있다. 서문시장이 정치인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건 1997년 치러진 제15대 대선부터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 전 총재가 서민적 이미지를 위해 시장을 찾았다.

서문시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치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정치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에 대한 역풍이 불자 세 결집을 위해 서문시장에 방문했고, 2012년 대선 과정에서도 방문했다.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시장을 찾았던 그의 마지막 방문은 4지구 대형화재가 발생한 2016년이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탄핵이라는 정치적 최대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지율 정체를 대구 방문으로 돌파하곤 했다. 그 중심지는 역시 서문시장이었다. 김건희 여사가 올해 초 서문시장을 방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서문시장이 낳은 부자들
삼성상회 차리고 무역업 시작 이병철
국채보상운동 주역이자 거상 서상돈
소금 장사~대구은행 설립한 정재학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서문시장 백년의 발자취 (2)…혼수 장만 전국적 명성·정치 1번지·부자 발상지…대구 소울푸드 주도

◇…전국적인 명성을 떨쳐 온 서문시장은 부자신화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1938년 서문시장에 삼성상회를 차리고 무역업에 뛰어든 이병철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 정도로 익숙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부자들의 성공 스토리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이가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이다. 김광제와 더불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은 보부상 출신으로 거부가 된 인물이다. 박해를 피해 경상도로 들어온 가톨릭 집안 출신으로 김천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의 사후 외가가 있는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 앞밖거리(혹은 앞밖걸-지금의 약전골목 남쪽 좁은 길)에서 가게의 심부름꾼으로 시작해 자립하여 보부상이 된 후 20여 년 만에 3만석 넘는 재산을 모아 1895년경에는 대구 최고의 거부로 등장했다. 그는 소금, 쌀, 한지 등의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이상화의 조부이자 우현서루의 설립자로 유명한 이동진 역시 서문시장에서 거부의 꿈을 키운 이다. 이동진은 편모슬하에서 자라 종이 살 돈이 없어 가랑잎에 글씨를 쓰고, 장터를 다닐 때도 솔잎을 따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는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시전, 요즘의 대부업으로 돈을 모았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상점을 열고 장사를 시작하며 낙동강 뱃길을 이용해 부산의 해산물과 경상 내륙의 쌀과 콩을 교환하는 어염미두 무역에 뛰어들었다. 장사를 통해 쌓은 부를 바탕으로 대지주가 된 이동진은 민족지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이었던 우현서루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해 내는 등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금융자본가로 이름을 날린 정재학은 스무 살 즈음까지 서문시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건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뜻한 바 있어 이동진에게 돈을 빌려 명태장사를 하며 기반을 잡았다. 이후 낙동강수운을 이용해 쌀과 소금장사를 했다. 마침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소금이 몸에 좋다는 입소문이 퍼져 소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소금값이 급등해 정재학은 금세 대구의 대부호 반열에 올랐다. 1912년 일본 자본가들이 선남은행을 설립해 대구 금융계를 지배하려 하자 이일우, 장길상, 최준 등과 함께 민족은행의 기치를 내걸고 1913년 대구은행을 설립하고 대주주로서 은행장에 취임했다. 이후로 그는 다른 사업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1940년까지 대구은행을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의 대구은행 설립은 일제에 대한 커다란 저항세력으로 한국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길러주는 데 큰 몫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구 직물계의 대부로 불리던 김성재는 일제 강점기 말 대구 직물업계를 쥐락펴락하던 인물이었다. 서문시장 인근에서 보부상으로 업계에 발을 디딘 그는 열세 살의 나이에 포목행상을 시작해 1930년대 대구 시내 중심가에 김성재상점을 열고, 일본은 물론 중국의 거상들과도 거래를 트며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1930년대 후반 김성재상점의 직물류 판매액이 대구 시내 모든 포목상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는 1939년 수출을 목적으로 한 동화직물회사를 설립하고, 신암동에 100여 대의 직기를 둔 공장을 세웠다. 이로써 상인 자본이 산업자본화하는 전기가 마련됐다.

이 외에도 서문시장이 배출한 거부로는 우피무역을 통해 전국 최대 무역상으로 이름을 떨친 한윤화, 미곡상으로 유명했던 한익동, 서상현, 서상일, 장길상 등이 있다.

별천지 먹을거리
엄마손 잡고 먹은 최고의 주전부리
삼각만두·떡볶이·콩나물 양념 어묵
수십 개의 노점 늘어선 칼국수 골목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찾은 서문시장은 아이의 눈에는 별천지였다. 수많은 사람과 그보다 더 많은 구경거리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쉽게 싫증 내는 아이에게 엄마는 맛있는 먹을거리를 보여주며 달래준다. 필자가 기억하는 서문시장의 맛은 칼국수와 잔치국수 그리고 만두, 떡볶이였다.

부침개처럼 얇은 납작만두는 최고의 주전부리 거리다. 박정희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으로 1960년대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새롭게 나타난 메뉴가 만두였다. 그런데 밀가루가 흔해진 것만큼이나 만두소가 부족했다.

만두소 대신 당면과 채소를 적게 넣어 부침개처럼 얇은 만두를 기름에 부친 뒤 양념장에 찍어 먹게 되면서 나타난 것이 납작만두다.

서문시장에는 납작만두의 업그레이드 버전도 있다. 삼각만두다. 납작만두보다 만두소가 조금 더 들어가고, 기름을 넉넉히 둘러 튀기듯 굽는다. 양파와 땡고추가 들어간 양념장을 듬뿍 뿌려 칼칼하게 먹는 게 일품이다.

떡볶이 국물에 납작만두와 삼각만두를 푹 담갔다 먹는 것도 실은 분식을 더 다양하게 즐기는 방법이다.

양념어묵은 대구 맵부심의 결과물이다.고추장 양념으로 붉게 물든 국물에 어묵을 익혀낸다. 양념이 밴 어묵을 고춧가루로 만든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매콤하고 달콤한 맛이 온 입에 휘몰아치게 된다. 양념어묵 위에 콩나물을 잔뜩 얹은 장여사 매콤한양념오뎅은 서문시장의 명물이 됐다.

분식으로 허기를 면했다면 이제 본격적인 식사 시간이다.

실제로 대구의 국수사랑은 유별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회사인 '풍국면'이 대구에 설립된 게 1933년이고, 이병철 회장의 삼성상회에서 주력으로 다뤘던 제품도 국수다.

당연히 서문시장의 주요 먹거리도 국수다. 서문시장 안에는 칼국수 골목이 있다. 4지구와 1지구 사이 골목에 수십 개의 노점이 일렬로 늘어서 칼국수를 판다. 같은 음식을 팔아서 장사가 되겠냐고 묻곤 하지만 그건 실상을 모르는 '시근 없는' 소리다. 국물을 우려내는 비결과 맛을 결정하는 고명이 사람의 지문마냥 다 다르다. 칼국수와 수제비를 같이 맛볼 수 있는 칼제비도 인기다.

주문과 동시에 면을 삶는데, 그 조리과정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재미도 서문시장만의 매력이다.

면보다 밥이 더 좋은 사람은 옆 골목을 찾아가면 된다. 주차장 빌딩 뒤편으로 가다 보면 비빔밥거리를 만날 수 있다. 계절마다 조금 다르지만 무생채, 버섯, 호박볶음, 콩나물, 배추겉절이, 미역줄기와 김가루 등 7가지가 넘는다. 푸짐한 보리비빔밥에 김치와 된장국, 콩비지와 풋고추를 곁들이고, 고추장 한 숟가락을 올려 쓱쓱 비벼 먹는 것을 보면 절로 침이 고인다.

홍석천기자 hongsc@yeongnam.com

〈자료제공: 대구교육박물관·DGB대구은행 향토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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