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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무렵의 서문시장. <대구교육박물관 제공> |
'대신동 간다'라는 말은 대구 사람에게는 시장에 간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서문시장이 대신동에 있기 때문이다.
대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꼽으라면 대구사람이면 누구나 첫손으로 꼽는 곳이 '서문시장'이다. 서문시장은 도소매 거래나 물류 같은 기본적인 기능 외에 우리나라 근현대사 속 전환점 때마다 지역민을 하나로 모으는 상징적인 곳이다.
물론 서민의 우여곡절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왔고, 이런 와중에 다양한 전통시장 문화를 만들어 내며 희로애락을 함께 만들어 왔다.
그런데 서문시장이 대신동에 자리 잡은 게 불과 100년밖에 되지 않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현재 서문시장은 일제시대였던 1923년 지금의 대신동 일대로 이전해 자리 잡았다.
전국 3대 시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서문시장이 왜 옮기게 됐으며, 어떻게 성장했는지, 대구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각인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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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상기간이라 모두 백립을 쓰고 있다. 제복 차림의 인물은 순검이다. 멀리 보이는 숲은 동산의 선교사 사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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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앞두고 제수를 마련하러 온 사람으로 북적이는 서문시장. 〈대구교육박물관 제공〉 |
◆근대사의 굴곡 함께한 서문시장
조선 초기 서문시장은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자리 잡은 조그만 향시(鄕市)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에 경상감영이 들어서면서 대구는 영남의 정치, 경제, 국방의 거점으로 도약을 거듭했다. 17세기 대동법의 실시는 서문시장이 전국 3대 시장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임란 이후 조정은 기존의 조세를 지방 특산물(공물) 대신 쌀이나 면포로 내게 했는데 이 일로 민간에 상업이 장려되고, 고을마다 향시가 서서 상업이 크게 흥하게 되었다.
여기에 조운선(漕運船), 보부상들이 등장하고 유통, 물류가 발달하며 대구는 일약 영남 경제의 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상권의 신장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엔 '서문시장에 가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시(場市)가 흥했고 마침내 서문시장은 전국 3대 시장으로 도약하며 조선 유통, 상업, 물류의 중심이 되었다.
대구의 시장은 대구장 또는 읍장이라 불렸고, 뒤에 흔히 서문 밖 시장 또는 서문시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시장의 규모와 거래액이 크기에 '큰장' 또는 '대구 큰장'으로도 불렸다. 그 밖에도 맏형격인 서문시장을 비롯해 화원장, 현내장, 무태장, 백안장, 범어장, 오동원장, 풍각장, 해안장 등 여덟 곳의 장시가 더 있어 대구는 전주, 평양과 더불어 3대 향시의 하나로 꼽혔다.
이 시설의 서문시장은 경상감영에서 서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 매 2일과 7일에 열렸다. 지금의 지명으로는 동산동과 시장북로, 서문로 1·2가, 대신동, 계산동 1가, 인교동에 걸쳐 5천여 평의 면적에 드넓게 자리했다.
입지로 보자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국도와 접하고, 북으로는 안동, 의성, 김천, 상주로 통하고, 남으로는 현풍과 고령, 서로는 성주로 가는 길목이 있다. 그러기에 서문시장에는 대구와 달성, 그 가까운 곳에 있던 군에서 농부와 상인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쌀과 콩, 가축, 기타 농산품을 소와 말에 싣거나 지게와 봇짐에 지고 와서 팔고, 돌아갈 때에는 일용품, 어류 따위를 샀다. 멀리에서 오는 물품은 주로 면포, 가축, 인촌(성냥), 석유, 소금 등이었다. 소 시장도 매우 성황을 이뤘다.
서문시장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역사적 현장이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을 담당할 조직인 금연상채회는 서문시장 한가운데인 북후정에서 군민대회를 개최해 의연금 모금을 이끌어 냈다. 또한 전 민족적 항쟁인 3·1운동이 경상도 최초로 폭발한 곳 역시 서문시장이었다. 1919년 3월8일 당시 대구의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은 서문시장 한복판에 쌀가마니를 쌓아 만든 임시 강단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운동 연설을 거행했다.
서문시장은 1923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923년 대구부는 '시구개정사업'에 따라 약 39만원의 예산으로 천황당못을 메우고, 그 주변을 정비해 새롭게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서문시장은 전체면적 1만5천리㎡에 5구로 나눠 조성됐다. 지구 사이에는 가로·세로 8.1m, 내지 10.8m의 통행로가 만들어지고, 통행로 양측에 하수구가 설치됐다. 1천640㎡ 규모의 건물도 갖추었는데 잡화점이 3동, 어물전과 곡물상이 각 2동, 창고 1동으로 구성됐다.
1923년도의 서문시장 매매 거래액은 농산물 71만9천원, 수산물 91만6천원, 직물 55만6천원, 축산물 27만1천원 등 총 347만5천원이었다. 1924년 수해로 한동안 침체했던 서문시장은 1928년 거래액이 259만5천원 규모로 늘어나면서 같은 3대 시장으로 평가받던 평양시장의 150만원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홍석천기자 hongsc@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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