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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
# 양곡관리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3법. 낯설지 않은 이들 법안을 관통하는 단어는 '시행 불발'이다. 민주당 발의-국회 통과-대통령 거부권 행사-폐기 수순을 밟은 게 데칼코마니다. 민주당의 입법안은 자주 대통령 거부권에 제동이 걸렸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힘과 정부 정책은 민주당의 다수 의석에 막힌다. 정부 재량은 딱 시행령 개정까지다. 법률 제·개정 사안은 거야의 벽을 넘어야 한다. 정부가 하릴없이 '정책 공수표'를 남발하는 이유다. 분양가 상한제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 폐지를 담은 주택법 개정안, 고준위 방폐물 특별법 등이 국회 상임위에 묶여 있다. '비토크라시(vetocracy·거부민주주의)'의 명징한 단면이다. 비토크라시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가 2013년 미국의 양당 정치를 비판하며 쓴 용어다.
'김건희 특검법'은 대통령 거부권의 화룡점정이며 비토크라시 정국의 분수령이다. 민주당은 28일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과 대장동 50억클럽 쌍특검법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한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국민 70%는 김건희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에 반대했다. 찬성 여론은 20%. 당정대 협의회에서 특검법 수용 불가 입장을 정리했지만 후폭풍이 만만찮을 전망이다. 국회 재의결에서 부결을 100% 장담하기도 어렵다. 재의결 표결은 무기명 투표다. '공천 학살' 피해의원들의 반란 충동을 부추길 소지가 다분하다. 민심을 거스른다는 점도 부담이다. '한동훈 비대위'의 뇌관이자 시험대다.
# 대런 애쓰모글루 MIT 교수의 공동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국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번영의 풍향계를 제시하는 '신국부론'이다. 포용적 정치제도가 포용적 경제제도를 만든다며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착취적 정치를 국가 실패 이유로 꼽는다. '폴리코노미(policonomy)'는 정치가 경제를 휘두르는 현상을 말한다. 내년은 글로벌 선거의 해다. 한국 총선, 미국 대선, 인도 총선을 비롯해 세계 40개국에서 총선과 대선이 펼쳐진다. 선거는 폴리코노미를 심화하고 폴리코노미는 포퓰리즘을 낳는다.
우리도 총선 목전의 폴리코노미 현상이 심상찮다. 주식 양도세를 부과하는 대주주 기준을 10억원에서 50억원으로 조정한 게 대표적이다. 대주주의 연말 매도 폭탄을 막아 개미 투자자들을 보호하겠다고? 그들의 표심을 얻겠다는 속내 아닐까. 주식투자 인구 1천400만명의 0.05%에 불과한 대주주 기준을 더 완화하는 게 경제민주화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조세원칙에도 어긋나는 '큰손' 우대정책에 불과하다. 10억원 기준을 내년까지 유지하기로 한 여야 합의도 깼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이달 초까지만 해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공매도 전면 금지도 시행 열흘 전까지 금융위원장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지 않았나. 경제 논리가 정략 정치에 휘둘렸다는 방증이다. 은행권이 자영업자 187만명에게 평균 85만원의 이자를 돌려주는 '민생 금융지원 방안'도 폴리코노미 성격이 강하다. 소득·자산을 따지지 않아 '부자 사장님'까지 혜택을 보는 데다 2금융권과 대부업체가 제외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다.
비토크라시와 폴리코노미는 여의도 정치의 최대 난제이기도 하다. 비토크라시는 지루한 길항정국의 산물이자 양당 정치의 후과다. 폴리코노미는 승자독식 선거의 질곡이다. 대화정치의 물꼬를 틀 제3당 출현과 유권자의 공약·정책 리터러시가 필요한 시간이다.
박규완 논설위원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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