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 〈9〉형체 없는 거문고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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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10  |  수정 2024-06-17 19:32  |  발행일 2024-05-10 제18면
"도연명에겐 현 없는 거문고가, 내겐 형체 없는 거문고가 있소"
조선 중기 대구부사 지낸 김윤안
도연명 詩 지극히 사랑했던 인물
줄 없는 무현금 즐긴 도연명 넘어
마음 속의 거문고로 근심 씻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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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장수현기자

'줄 없는 거문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체 없는 거문고'를 이야기한 선비가 있다. 안동(풍산) 출신으로 대구부사를 지낸 동리(東籬) 김윤안(1560~1622)의 '무형금(無形琴)'이다. 그는 도연명에게 줄 없는 거문고(無絃琴)가 있었다면 자신에겐 형체 없는 거문고(無形琴)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김윤안은 작은 초당을 하나 마련한 뒤 적은 글 '소우당기(消憂堂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매우 가난하였는데 늘그막에 구산(龜山) 아래에 집을 빌려 살았다. 집 둘레는 휑하여 바람과 햇빛조차 가릴 수 없었다. 손님이 오면 늘 마당에 앉아서 맞았다. 10년을 경영하여 초당 한 채를 지었는데, 한 해가 가고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 초당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면에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초당에는 빈 땅이 없어서 대나무나 꽃 따위를 심을 수 없었다. 다만 국화 몇 포기가 있어서 때가 되면 피었다. 창은 '남창'이라 하고, 뜰은 '면가(眄柯)'라 하고, 문은 '상관(常關)'이라 불렀다. 초당 동쪽에 나지막한 울타리가 있었는데 '동리(東籬)'라 하였다. 이 모두를 합한 초당의 이름을 '소우당(消憂堂)'이라 하였다. 모두 도연명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근심은 마음의 병이다. 풀어서 없어지게 하여 즐겁게 된다면, 천지 만물이 모두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어떤 손님이 물었다. '사모할 만한 옛 성현이 한둘이 아닌데 그대는 초당의 창, 문, 뜰, 울타리를 모두 도연명의 말에서 가져와 이름 붙였소. 그대는 어째서 오로지 도연명만 별나게 흠모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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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다. '그를 흠모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그와 같았을 뿐이오. 내가 가난한 것이 도연명과 같고, 초당에 책이 있는 것이 도연명과 같고, 남쪽에 창이 있고 동쪽에 울타리가 있는 것이 도연명과 같고, 문이 늘 잠겨 있어서 쓸쓸한 것이 도연명과 같소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지 구차하게 흠모하는 것이 아니라오.' 손님이 또 말했다. '그대의 말은 그럴듯하오. 도연명은 거문고(琴)와 책을 즐기며 근심을 씻는다고 하였는데, 그대의 초당에는 책은 있으나 거문고가 없으니 어찌 된 일이오?' 내가 '도연명은 줄 없는 거문고인 무현금(無絃琴·원 안)을 가졌고 나는 형체 없는 거문고인 무형금(無形琴)이 있으니, 어찌 거문고가 없다고 하시오'라고 대답했다. 손님이 웃으면서 떠나갔다."

김윤안은 이 기문에서 도연명의 '무현금'을 넘어 '무형금'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줄 없는 거문고가 아니라, 아예 거문고 자체가 없이 거문고의 세계에 노닐 것을 꿈꾸고 있다.

◆도연명을 흠모한 김윤안의 '무형금'

김윤안의 호 동리(東籬)는 도연명의 시에서 따와 스스로 아호로 삼은 이름이다. 김윤안은 이 글에서 보듯이 초당의 창과 문, 울타리, 뜰의 이름을 모두 도연명의 시 구절에서 따올 정도로 도연명을 지극히 사랑한 인물이다. 김윤안은 소고 박승임,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에 참여하여 김해(金垓)의 막하에서 문서 수발을 도맡았고, 영남 유생들이 회재 이언적을 변호하고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 운동을 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선조 후반과 광해군 때 관직에 나아가기도 하였지만, 대구부사를 마지막으로 귀향해 소우당을 짓고 은거했다.

많은 선비들이 도연명을 사모하고 그의 시풍을 본받으려 했다. 퇴계 이황은 도연명의 시를 읽고 맛을 보면 속세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만물 가운데 홀로 초탈하게 서 있는 느낌을 준다고 이야기했다. 김윤안은 류운용과 류성룡 등을 통해 이황의 학맥을 이었다. 도연명은 열심히 공부해서 벼슬길로 나아가 이상적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뜻을 펼칠 상황이 안 되면 미련 없이 물러나는 출처진퇴(出處進退)의 모범을 보인 상징적인 인물이다. 김윤안은 소우당 곳곳에 도연명의 시 구절을 끌어들여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형체마저도 없는 무형금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단속할 힘이 충분하다면 유현금이나 무현금 모두 필요 없을 것이다. 마음속에 무형금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탈 수 있을 것 아닌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조선 후기 문신인 귀와(龜窩) 김굉(1739~1816)은 1811년 12월 동리선생문집 발문(跋文)에서 김윤안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동리(東籬)라는 자호(自號)로 집에 편액을 단 뜻은 도연명의 풍류를 듣고서 흥기한 것이다. 바야흐로 그 남창에 기대어 노닐고 동쪽 언덕에서 시를 읊조리며, 거문고와 책을 통해 온갖 근심을 없애고, 구름과 새에게 한가한 심정을 부치고, 소나무 오솔길을 거닐고 국화꽃을 따며 지냈다. 그 그윽한 운치와 구함이 없는 뜻은 시대는 달라도 흥취는 같으니, 천년 세월이 아침저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선생이 다만 그 적적하고 한가한 취미를 좋아해서 아름다운 겉모습만 표방하고자 한 것이겠는가. 아마도 반드시 분발한 바가 있어 뜻을 부친 것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이다.'

김윤안은 54세 때인 1613년 봄부터 1615년 겨울까지 대구부사로 재임했는데, 당시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태고정(太古亭)을 위해 시를 한 수 남겼던 것 같다. 태고정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1417~1456)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그의 손자인 박일산이 1497년에 처음 건립한, 사당인 절의묘(節義廟)가 딸린 종택의 별당 건물로 지은 정자다. 지금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일부만 남은 것을 161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김윤안은 1614년 태고정이 재건된 후 이 정자를 찾아 시를 남겼을 것으로 보인다. 태고정에 오르면 김윤안의 시판이 걸려 있다.

'정자 이름이 어찌하여 태고인고(亭名何太古)/ 주인의 마음이 태고라네(主人心太古)/ 원컨대 태고의 마음으로(願得太古心)/ 일마다 모두 태고이기를(事事皆太古)'. '태고'를 구절마다 사용해 지은 시다. 이 시 현판의 글씨는 전서로 되어 있는데, '태고(太古)' 글자 모두를 각기 다른 전서로 써서 눈길을 끈다.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5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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