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민체육관에서 열린 '달성군보훈가족 감사한마당' 행사에서 곽임용 옹이 6·25참전 유공자 대표로 대구보훈청장 표창장을 받고 있다. <곽임용 옹 제공> |
"그 당시에는 하루 1천 명이 소집되면 1천 명이 죽어 나간다는 말이 있었다. 며칠을 굶고도 싸우러 갔다. 건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웠다."
6·25 참전 유공자 곽임용(93·달성군 화원읍) 옹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19세였다.
어린 나이에 징집돼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38선이 위치한 경기도 연천 최전방에서 3년간 복무하고 휴전 후 만기 제대했다. 20사단 창설병이며 밤마다 암호 수령 해서 연대에 보고하는 연락병 업무를 맡았다. 잘 때도 전화기를 귀에 대놓고 쪽잠을 잤다.
곽 옹이 들려주는 최전방에서의 상황은 영화처럼 살벌했다. 인민군이 밤새 공중을 빙빙 돌며 조명탄을 쏘고 폭탄을 떨어뜨리면서 밀고 내려왔다. 새벽이면 다시 아군이 밀고 올라가는데 불에 탄 잿더미에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그렇게 뺏고 뺏기는 싸움이 반복됐다.
"총알이 아무리 쏟아져도 안 맞는 사람은 안 맞더라.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던 사람이 폭탄 파편이 옆구리를 파고들어 와 창자가 쏟아졌는데 내 이름을 부르면서 죽었다"라며 70년이 지난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선명한 듯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곽 옹은 최전방에서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다. 6·25참전용사회 달성군지회 화원읍지부장을 2023년까지 지냈다. 지난 4월엔 '달성군보훈가족 감사한마당' 행사에서 대구보훈청장 표창장을받았다.
대구 달성군민체육관에서 열린 '달성군보훈가족 감사한마당'에 설치된 포토존에서 곽임용 옹이 배우자 문윤선씨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곽임용 옹 제공> |
곽 옹의 고향은 달성군 현풍면이다. 그는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전쟁 중에 형과 남동생을 모두 잃었다. 시집간 누나가 곽 옹을 군대에 보내놓고 3년을 하루같이 정안수 떠놓고 시집 식구 몰래 빌었다. 그러던 중 꿈속에서 비슬산 용이 내려와 이제 기도를 그만해도 된다고 선몽을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정확히 3일 뒤 곽옹은 기적처럼 다친데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직도 누이 덕에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믿는다.
곽 옹은 28세때 문윤선(당시 22세)씨와 가정을 꾸려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 옷장사, 목수일, 만물상회, 덤프트럭 사업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화원 전통시장에서 꽈배기 장사를 해 방앗간도 차렸다. 현재는 막내딸과 외손녀가 대를 이어 방앗간을 운영 중이며 '60년 전통 3대가 함께하는 방앗간'으로도 유명하다.
곽 옹은 요즘 젊은 세대에게 당부의 말도 남겼다.
"요즘 젊은이는 개는 키우면서 애는 안 낳는다. 우리는 그 난리를 겪고도 아기 생기는 대로 낳아서 키웠다. 고생스레 5남매 키웠지만 뒤돌아보니 흐뭇하다. 그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다. 요즘 젊은이는 낳지도 않고 미리 포기한다. 정부는 젊은이가 결혼하고 아기 낳아 키울 수 있는 대책을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
진정림 시민기자 truefore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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