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스트 뇌과학과 교수 |
이제 제법 밤이 길어졌습니다. 덕분에 어둠이 깔린 퇴근길을 재촉하여 집에 돌아와 책들을 읽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최근 향기 박사가 열심히 읽는 책은 그리스 신화입니다. 얼마 전 읽은 부분은 어둠을 지배하는 여신, 닉스와 그녀의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닉스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는데, 그중 한 자녀는 잠의 신 히프노스입니다. 그런데 잠의 신, 히프노스의 쌍둥이 형제가 죽음의 신 타나토스인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하면 면역력이 떨어져 병에 걸리기 쉽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를 상상해 보았거든요.
뇌과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잠을 통해 하루 종일 일을 한 뇌에 휴식과 재충전할 시간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잠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준 최고의 간호사"라고까지 표현했죠. 그런데 사실 뇌는 우리가 잠든 사이 쉬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일을 합니다. 우선 뇌는 우리가 자는 동안 하루 일을 돌아보고 중요한 일은 장기 기억으로 잘 챙기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립니다. 2013년 수면 전문연구자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버클리)의 Matthew Walker 교수 연구진은, 사람이 제대로 잠을 자지 않으면 기억에 가장 중요한 뇌 조직인 해마에 안 좋은 영향을 주어, 뇌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능력을 40%나 잃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즉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거죠.
또 뇌는 우리가 자는 동안 하루 종일 활동하면서 뇌 속에 쌓인 노폐물을 처리합니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 Maiken Nedergaard 교수 연구진은, 2012년 뇌 속의 노폐물 처리시스템인 글림프 시스템을 처음 찾았고, 다시 2013년 이 노폐물 처리시스템이 우리가 잠든 사이에 더 활발히 작동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어 생쥐를 이용한 연구를 통해 치매 발병에 깊이 관여하는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글림프 시스템을 통해 배출되며, 생쥐가 깨어있을 때보다 잠을 자는 동안에 더 활발하게 배출활동을 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글림프 시스템은 마치 내일을 위해 모든 사람이 잠든 한밤중에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분같이 고마운 존재인 거죠.
미국 마운트 시나이 아이칸 의과대학의 Cameron McAlpine 교수 연구진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2024년 'Nature'지에 발표합니다. 이 연구진은 심장마비가 오면 면역세포인 단핵구(monocytes)가 뇌로 유입되어 깊은 수면을 유도하여 심장의 염증을 완화하고 회복을 돕는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심장마비 후 1~2일 동안 뇌에서 단핵구가 증가한 것을 확인했으며, 심장마비 이후 4주 동안 수면의 질에 따라 환자를 분류했을 때, 수면이 부족했던 환자들은 향후 심혈관 질환의 재발 위험이 두 배 높았으며, 수면의 질이 좋은 환자들은 심장 기능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이는 심장과 뇌가 수면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심장 회복을 조절하는 새로운 기전을 보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심장마비 이후 재활에는 잠이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었고, 결국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검증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건강한 성인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심장 스트레스와 염증 반응이 증가하는 것도 함께 확인했습니다. 즉 잠은 단순히 심장마비 이후 심장 회복만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 전반의 면역기능을 활성화해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데도 이바지할 것임을 시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잠의 신 히프노스의 형제가 노화에 관련된 신, 게라스인 것도 놀랍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잠이 모자라면 면역기능이 떨어지고 결국 노화가 촉진된다는 의학상식도 갖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렇게 잠은 뇌는 물론 우리 몸 건강 유지에 매우 중요한 활동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부모님도 시험 준비로 지쳐 잠시 조는 자녀에게 "이 상황에 잠이 오냐, 잠이 와?"라고 하면서 혼내시면 안 되겠죠? 잠은 우리 자녀는 물론 나와 가족을 지켜주는 면역력을 충전시켜 주고 뇌 속 노폐물도 청소해 줄 것이니, 오늘부터 뇌와 면역기관이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충분한 잠을 자면 어떨까요? 디지스트 뇌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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