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풍요로운 문화도시 산소카페 청송] 1. 찬경루와 소헌공원

  • 박관영·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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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13 17:51  |  발행일 2025-05-13
아버지 출신지서 더 사랑받는 왕후…청송은 길이 ‘소헌’의 고향이다

14세때 세종대왕 충녕대군과 혼인

친정 풍비박산에도 모범적 왕비 역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비 칭송받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찬경루·운봉관 등 포함한 사적공원

2011년 소헌공원으로 선정 뜻 기려

청송군은 2025년 문화·체육·경제 분야에 총 288억 원을 투입해 '문화로 미소 짓는 상생경제' 실현을 목표로 “선순환 지역경제, 북적북적 문화체육"이라는 전략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줄 공연·강좌·축제 등 다채로운 문화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뤄 관광자원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관리·발굴해 군민의 자긍심을 높이려는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또 체육 분야에서도 체육 시설을 확충하고 각종 스포츠 대회를 개최해 생활체육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일상이 풍요로운 문화도시, 산소카페 청송'은 청송군의 이러한 문화·체육·경제 분야의 노력과 성과에 대한 이야기다.

20250430 청송 소헌공원

청송 소헌공원. 2011년 찬경루와 운봉관을 포함한 사적공원 명칭을 주민 공모를 거쳐 '소헌공원'으로 선정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왕후의 고향 청송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의 지명을 알려준다. 대화를 풍성하게 이어가고 싶다면, 거기에 더해 다닌 학교, 어린 시절의 기억, 몇 살 때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등을 얘기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서원이나 향교를 둘러보는 여행객에게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고향을 묻는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마 집안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을 얘기해야 제대로 된 답변이 될 것이다.

오늘날 '고향'이라는 말은 개인의 기억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전통사회에서는 그가 속한 집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버지의 출신지 내향(內鄕), 어머니의 출신지 외향(外鄕), 아내의 출신지 처향(妻鄕)을 삼향(三鄕)이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청부현(靑鳧縣)이 소헌왕후의 고향이어서 진보현(眞寶縣)을 합해 군으로 승격시켜 청보군이라 했고, 세종5년(1423)에 송생현(松生縣)을 더해 청송군이라 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경상도 관찰사 홍여방도 찬경루기에서 청송을 '왕후의 고향'이라고 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이 청송 심씨이니 청송은 당연히 왕후의 고향(내향)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일상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본다면 청송을 소헌왕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헌왕후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지척에 있는 외가에서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선조들과 청송에 대해 알고는 있었겠지만, 아마 청송 땅을 밟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소헌왕후의 고향은 여전히 청송이다. 살아생전 그의 어릴 적 기억에 청송은 없었을지 몰라도, 그를 기억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의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청송이기 때문이다. 나그네들도 청송에 오면 소헌왕후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의 삶을 떠올리게 되고 그의 덕을 기리게 된다. 역사적 인물의 '고향'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도록 만들어주는 장소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태종8년(1408) 장래 소헌왕후가 되는 14세의 청송 심씨 소녀는 자기보다 두 살 어린, 나중에 세종대왕이 되는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과 혼인했다. 그때는 장차 왕비가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시아버지 태종이 친정아버지 심온을 죽이고 친정을 풍비박산 내게 될 것이라고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헌왕후는 이런 엄청난 일을 겪었음에도 왕비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해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비로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다.

20250430 청송 소헌공원 운봉관

찬경루 뒤편의 객사 운봉관은 청송군이 2008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정당과 서익사를 복원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고향사람들의 지극한 소헌왕후 사랑

청송 찬경루는 세종10년(1428) 군수 하담이 관영 누각으로 건축했으며, 소헌왕후와 청송 심씨 가문의 덕을 기린다는 뜻으로 '찬경루'라 이름 지었다고 찬경루기는 밝히고 있다. 이후 정조16년(1792)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새로 지었다. 당시 기록도 찬경루가 관영 누각임을 밝히고 있는데, 1927년 중수기 상량문에는 청송 심씨 시조 심홍부의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후기 어느 시기부터 관영 누각의 기능을 잃고 청송 심씨 문중의 제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찬경루는 2019년 보물로 지정됐는데, 청송에 있는 문화유산으로는 대전사 보광전, 보광사 극락전에 이어 세 번째다. 찬경루 뒤편의 객사 운봉관은 청송군이 2008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정당과 서익사를 복원했다. 2011년에는 찬경루와 운봉관을 포함한 사적공원 명칭을 주민 공모를 거쳐 '소헌공원'으로 선정했다.

찬경루 건너편 용전천변에는 높이 20여m의 기암절벽이 있는데 그 이름이 현비암이다. 영조 때 간행한 '여지도서'에는 비석을 세워놓은 것 같은 모습이어서 '현비암(懸碑巖)'이라고 했는데, 그 이후 자료들에는 어진 왕비라는 뜻의 '현비암(賢妃巖)'으로 표기되어 있다. 소헌왕후를 기리는 뜻에서 청송 사람들이 그렇게 바꾼 것일 터이다.

20250430 청송 소헌공원 찬경루

청송 소헌공원 찬경루는 세종10년(1428) 군수 하담이 관영 누각으로 건축했으며, 소헌왕후와 청송 심씨 가문의 덕을 기린다는 뜻으로 '찬경루'라 이름 지었다고 찬경루기는 밝히고 있다. 이후 정조16년(1792)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새로 지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재해석되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삶

'고향'사람들의 소헌왕후 사랑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23년에는 청송문화관광재단이 청송군 개군 600주년을 맞아 소헌왕후의 삶을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 퓨전 국악콘서트 '소헌왕후-청송 愛歌(애가)'를 소헌공원에서 개최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어 2024년에는 창작합창서사시 음악극 '소헌실록'을 소헌공원과 진보문화체육센터에서 두 차례 공연해 소헌왕후의 충절과 헌신을 재조명했다.

이러한 청송 사람들의 노력은 단순히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에 그치는 게 아니라 미래를 향해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삶도 현재의 시각에서 꾸준히 재해석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현대의 부부들도 본받을 만한 모습이 군데군데 보인다. 소헌왕후의 행적에도 당시 가치관이 여성들에게 강조했던 인내와 순종을 넘어선 주체적인 모습도 엿보인다.

세종8년(1426) 2월, 세종이 도성을 비운 사이에 서울에 큰 불이 나 2천여 채의 집이 불타고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소헌왕후는 불이 나자 만삭의 몸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대신과 백관을 지휘했다. 세종16년(1434)에는 세종이 강무(講武,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로 거둥하면서 “밤에 궁문을 열고 닫는 것은 늘 중궁의 명령에 의해 하라."고 했으며, 세종21년(1439)에는 “긴급한 일이 있으면 행재소(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로 달려와 아뢰지 말고, 중궁의 명령을 들어 시행하라."라고 했다.

이러한 신뢰는 소헌왕후가 내명부를 이끌면서 보여주는 리더십에 세종이 감명을 받아 차곡차곡 쌓였을 것이다. 실록에는 세종이 “중궁이 궁인을 대우하는데 매우 은혜와 예절이 있었다."면서 “궁인이 죄가 있으면 몸소 책망하거나 벌주지 않고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이를 결정하였다."고 하는 장면도 있다. 왕후가 악역을 남편에게 떠넘긴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벌할 때에도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해 벌 받는 이가 승복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밝은 덕 후대에 모범으로 남다

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의 기록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의정부에서 왕비의 시호로 소헌·효순·효선을 추천하니 세종은 소헌을 선택한다. 그 뜻을 아뢰는 장면의 우리말 번역은 “소헌(昭憲)은 성문(聖聞)이 주달(周達)한 것이 소(昭)이고, 선(善)을 행하여 기록할 것이 헌(憲)입니다"라고 돼있다. 왕후가 보여준 밝은 덕을 후대에 길이 모범으로 남기고 싶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데, 왕후의 삶을 되돌아보는 세종의 감회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뒤에 예조판서 정인지가 영릉에 올릴 지문(誌文)을 지어 바쳤다는 기사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 글에는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이와 같았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정인지의 눈에도 세종이 왕후를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내명부 구성원들에게 두루 은혜를 베풀고, 그들로부터 사랑과 공경을 받았다는 내용 뒤에 “국모(國母)로 있은 지 29년 동안(…) 한 번도 친척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라는 대목은 다소 놀랍기까지 하다.

20250430 청송 소헌공원 부사송덕비

청송 소헌공원 부사송덕비.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무성한 상록수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라

세종은 자신의 치세가 안정기에 들어선 후에 신하들이 장인 심온의 복권을 주청할 때마다 선왕 때의 일을 경솔히 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문종이 왕위에 올라 신속히 외할아버지 심온을 복권시키고 안효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된다. 세종이 장인과 처가 식구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소헌왕후가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세종은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찬경루에 걸려있는 '송백강릉(松柏岡陵)' 편액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해석해볼 수 있겠다. 시경에 수록된 시 천보(天保)에서 따온 구절이므로, 그 문맥에 따라 읽으면 무성한 상록수들처럼 왕가가 끊임없이 이어지리라는 기원으로 읽힌다. 찬경루에 편액을 걸 때는 그런 뜻이었지만, 그 왕조가 끝난 지 100여년이 흐른 지금에는 글자 그대로 '산등성이와 언덕에 소나무 잣나무가 무성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겠다. 그 또한 청송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에 어울린다. 2025년 봄에는 청송 인구가 점점 늘어나 지방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기를 기원하는 구절로, 최악의 산불이 청송의 땅과 사람들에게 입힌 상처를 이겨낼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구절로 읽어도 되겠다.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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