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의 푸른길, 이야기를 따라 걷다] 6. 목은 사색의 길

  • 박관영·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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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7-16 20:20  |  발행일 2025-07-16
블루로드다리~괴시리 9.5km ‘위대한 어른’ 목은을 가슴에 새긴다

山전체 대나무숲인 죽도산

바다 따라 이어진 퇴적암층

얼굴바위는 자연의 조각품

대소산 봉수대 지나 망월정

사진구름다리 건너 괴시리

이성계 출사요청 거절하고

붓을 꺾은 이색의 고향마을

기념관 세워 생애·업적 기려

블루로드다리에서 영해의 괴시리 전통마을까지 9.5㎞를 블루로드 5코스 '목은 사색의 길'이라 부른다.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진실로 위대한 어른'이라 불렸던 목은 이색의 고향집으로 가는 길이다.


다리 아래로 축산천이 조용히 바다로 흘러들고 갈매기들이 모래톱에 모여 앉아 졸고 있는 항구의 뒤꼍, 호젓한 시작이다.


다리 건너 마주하는 오뚝한 산은 죽도산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공사로 폐쇄돼 있어 죽도산 둘레의 데크길을 따라 간다. 파도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바닥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푸른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다.


동해안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속해있는 영덕 축산 죽도산의 둘레길. 죽도산은 해발 80m의 아담한 산으로 무성하지만 시야를 가리지 않는 소죽(小竹)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동해안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속해있는 영덕 축산 죽도산의 둘레길. 죽도산은 해발 80m의 아담한 산으로 무성하지만 시야를 가리지 않는 소죽(小竹)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죽도산과 축산항


죽도산은 해발 80m의 아담한 산이다. 산 전체에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죽도산이다. 무성하지만 시야를 가리지 않는 대숲이 아늑하다. 산을 뒤덮은 대나무는 손가락 굵기의 낭창낭창한 소죽(小竹)이다. 조선시대 이 소죽은 화살의 재료로 쓰여서 나라에서 지켰다고 한다.


산에는 해국과 산국, 참나리, 섬쑥부쟁이, 칡넝쿨, 쑥, 복숭아나무 등도 자생한다. 봄날 복사꽃이 피면 산은 꽃목걸이 한 소녀처럼 그리 예쁘다 한다.


360도로 열린 산마루의 전망대는 지금 축산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변신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새로운 이름은 '동방언덕'이다. 시인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상징화해 낭만 가득한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수년 전 전망대에 올라 보았던 세상이 눈앞에 선하다.


죽도산은 원래 죽도였다. 자갈과 모래가 쌓이고 굳어져 만든 독특한 섬이었다. 조선시대까지 섬이었으나 바다 모래와 축산천의 모래가 계속 쌓이고 성장해 죽도와 육지가 연결됐고, 섬은 산이 됐다.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거대한 퇴적암층이 장관을 이룬다. 죽도산은 그 자체로 동해안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속해 있다. 데크 길을 따라 가면 '죽도산 퇴적암'의 특성과 암석의 다양한 풍화 지형을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얼굴바위'는 다섯 층의 사암과 역암으로 구성돼 있는 자연의 조각품이다. 암석의 갈라진 틈 사이로 마그마가 분출해 굳어버린 푸른빛의 암맥도 볼 수 있고, 마그마가 재빠르게 흐르는 동안 꼼짝없이 붙잡혀 그대로 굳어버린 사암, 화강암, 규암, 편마암 등도 보인다. 푸른빛의 바위에 크고 작은 돌들이 쿵쿵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틀림없다.


영덕 축산 죽도산에서 본 축산항. 오른쪽 아래 보이는 산마루 전망대는 새로운 랜드마크로 변신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시인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상징화해 '동방언덕'이라는 새 이름이 붙을 예정이다.

영덕 축산 죽도산에서 본 축산항. 오른쪽 아래 보이는 산마루 전망대는 새로운 랜드마크로 변신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시인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상징화해 '동방언덕'이라는 새 이름이 붙을 예정이다.

데크 길의 북쪽 입구로 내려서서 축산항의 둥근 가장자리를 밟고 간다. '축산(丑山)'은 주위의 산세가 소가 누운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개항해 100년이 훌쩍 넘었다. '축산'이라는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는데, '축산포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지킨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말 죽도는 왜적들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그때 훗날 장군으로서 명성을 떨치는 청년 최윤덕이 아버지 최운해 장군과 함께 왜적을 소탕했다고 한다.


축산은 고려 우왕 때 만호영이 설치됐고 조선 초까지 이어져 동해안의 방어 요충지로 기능했다. 지금 걷고 있는 땅은 죽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육계사주다. 사주 위에 빼곡 들어선 집들은 온통 파란 지붕이고, 내항의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동해안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속해 있는 영덕 사진리의 대부정합. 이 부정합의 한쪽 암층인 편암층은 한반도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동해안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속해 있는 영덕 사진리의 대부정합. 이 부정합의 한쪽 암층인 편암층은 한반도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소산 봉수대 망월봉 사진구름다리


항구를 빙 돌아 와우산을 오른다. 소가 누워있는 형상의 와우산 초입에 '영양남씨발상지' 기념비가 서있다.


영양남씨의 시조는 당나라 사람 김충(金忠)이다. 신라 경덕왕 14년경인 서기 755년, 당나라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오던 김충은 풍랑을 만나 축산에 표착했다. 그가 이 땅에 살기를 원해 귀화하자 경덕왕은 그에게 남씨(南氏) 성을 내렸다. 그가 영양남씨의 시조로 이름은 민(敏)이다. 후손들은 의령, 고성 등으로 분파됐으나 모두 남민의 자손으로 격암 남사고가 그의 후손이라 한다. 축산항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남민의 유허비가 있다.


제법 느슨한 소의 등줄기를 따라 대략 15분이면 와우산을 넘고, 해안도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대소산 봉수대 입구다.


계속되는 오르막이다. 가쁜 숨이 피톤치드를 과식한다. 산길에는, 어쩐지 옳은 말 하고 유배된 사람의 느낌이 있다. 그렇게 2㎞ 즈음, ​저만치 봉수대와 KT통신탑이 보이고 한 구비 더 오르면 대소산 봉수대에 닿는다. 둥글게 돌을 쌓아 만든 봉수대와 철제로 엮어 높게 쌓아 올린 통신탑이 한 공간에 서 있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통신수단이 나란해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 최초의 봉수대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추측되지만 현재의 대소산 봉수대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축산만호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동해안을 지키던 국토의 눈이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축산항과 죽도산의 모습이 아름다워 먹먹하다.


이제 내리막이다. 유유자적 세월과 동행하듯 평정한 걸음이다. 동해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봉우리에 '망월정(望月亭)'이란 정자가 우두커니 산객을 맞는다. 망망대해 동해에 떠오른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멀리 있는 바다가 한 폭의 그림처럼 가만 멈춰 있다.


도로가 보이고, 거의 다 내려왔다는 섣부른 생각을 할 즈음 '사진구름다리'에 닿는다. 사진리와 괴시리를 잇는 포장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다. 다리 건너 다시 산길이다.


사진리 바닷가에는 동해안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속해 있는 '영덕 대부정합'이 펼쳐져 있다. 부정합은 서로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암층이 맞닿아 있는 구조를 의미하는데, 사진리에는 약 17억 년의 시간 차이를 가지는 부정합이 존재한다.


한반도는 여러 조각의 땅덩어리가 이동하다 충돌해 만들어졌고, 가장 마지막 땅덩어리가 충돌한 시기가 약 2억 3천만 년 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사진리 부정합의 한쪽 암층인 편암층은 한반도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에 만들어졌고, 다른 암층인 역암층은 한반도가 형태를 갖춘 이후에 쌓인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공백은 지구의 역사를 해석하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한다.


괴시리 전통마을로 가는 솔숲 오솔길의 목은 이색 산책로. 이 솔숲을 지나면 목은 이색의 생가터와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괴시리 전통마을로 가는 솔숲 오솔길의 목은 이색 산책로. 이 솔숲을 지나면 목은 이색의 생가터와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괴시리 전통마을


사진구름다리 건너 괴시리 전통마을로 가는 솔숲 오솔길은 '목은 이색 산책로'다.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 유명한 시를 지은 이가 바로 목은 이색이다. 그는 여말선초의 대학자이자 정치인이고,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14살에 성균시에 합격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 26살에는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해 문명을 날렸다.


원나라에서 고려로 돌아온 선생은 성균관 대사성이 돼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리고 한산부원군, 문하시중 등의 재상을 지내고 우왕의 사부가 돼 꺼져가는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는 심산유곡으로 몸을 숨긴 고려 충신들을 그리워했고,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고려 왕조와 무력해진 자신을 한없이 안타까워했다. 조선이 건국됐고, 목은은 젊은 시절 막역한 벗이었던 이성계의 정계출사 요청을 끝내 거절했다. 이성계는 목은을 귀양 보내고 종신토록 양반이 되지 못하게 했다. 이때 목은은 붓을 꺾었다.


영덕 괴시리 전통마을은 목은 이색의 외가가 있는 곳이다. 마을 앞에 8개의 못이 있어 '호지'라고 불렸던 이 마을은 목은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괴시'로 고쳤다. 지금도 마을 앞에는연못이 있고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호지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덕 괴시리 전통마을은 목은 이색의 외가가 있는 곳이다. 마을 앞에 8개의 못이 있어 '호지'라고 불렸던 이 마을은 목은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괴시'로 고쳤다. 지금도 마을 앞에는연못이 있고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호지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솔숲으로 둘러싸인 하늘이 열리고 경사진 산자락에 석축으로 단을 고른 환한 공간이 나타난다. 가장 아랫단에 원지, 그 위에는 방지, 그 위에는 정자, 그리고 그 위에 목은 이색의 생가터와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기념관 안에는 목은의 영정과 함께 생애와 업적이 자세히 소개돼 있으며 문집판과 목은집 등 관련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비탈진 길을 따라 마을을 관통해 내려간다. 이 마을은 목은의 외가로 그는 1328년 음력 5월20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옛날에는 송천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앞에 대략 8개의 못이 있어 호지(濠池)라 했다 한다.


목은은 원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돌아와 '호지'를 '괴시'로 고쳤다. 괴시(槐市)는 원나라 국자감박사 구양현(歐陽玄)의 고향마을 이름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는 커다란 방형의 연못이 있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호지마을, 호지말 또는 호지촌이라 부른다.


영덕 목은이색기념관의 내부. 목은 이색은 고려말조선초의 학자·정치인·시인이다. 14살에 성균시에 합격, 26세에는 원나라 과거에 급제했다. 정몽주, 길재, 이숭인, 정도전 등 많은 학자들이 목은의 제자였다.

영덕 목은이색기념관의 내부. 목은 이색은 고려말조선초의 학자·정치인·시인이다. 14살에 성균시에 합격, 26세에는 원나라 과거에 급제했다. 정몽주, 길재, 이숭인, 정도전 등 많은 학자들이 목은의 제자였다.

영덕 목은이색기념관. 목은의 영정과 함께 생애와 업적이 자세히 소개돼 있으며 문집판과 목은집 등 관련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영덕 목은이색기념관. 목은의 영정과 함께 생애와 업적이 자세히 소개돼 있으며 문집판과 목은집 등 관련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조선 초기의 뛰어난 학자들은 대부분 목은의 제자였다.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했고, 정도전, 권근, 하륜, 윤소종 등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했다. 목은은 1396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9년 후, 권근은 스승의 문집인 '목은집'에 서문을 썼다.


'그의 문장은 밝음으로 치자면 해와 달보다 더하고, 변화로 치자면 비바람보다 더 빨랐으며, 우뚝 솟아 산처럼 높고, 굽이침은 강과 바다처럼 넓었다. 아름다움은 꽃과 같고, 움직임은 새와 물고기처럼 활력이 넘쳤으며, 풍부함은 온갖 사물이 제각각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담고 있는 것과 같았다. (중략) 우리나라에 문장과 학문이 존재한 이후 이색처럼 뛰어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진실로 위대한 어른이다.'


이 글은 목은 선생을 가까이 상상하게 한다. 마을 앞에 영해평야가 드넓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영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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