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업 객원논설위원
1997년 IMF 외환위기는 3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 말은 우리가 경기 불황이 올 때마다 "시장에 사람이 없는 것이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하다"는 넋두리로 불황의 정도를 가늠하는 심리적 기준이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는 역사가 된 외환위기의 진행과정을 보면, 한창 성장 가도를 달리던 한국 기업들이 사업 확장을 위해 차입한 막대한 규모의 달러화 부채가 누적되는 사이, 1995년 엔화 평가절하를 골자로 한 역 플라자 합의로 일본에 수출을 잠식당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 때 미국이 금리를 올리고, 중국도 위안화 평가절하를 단행한다. 달러 빚이 잔뜩 쌓여 있고 일본과 중국과의 수줄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달러화가 금리가 높은 미국으로 몰리면서 우리나라의 달러 공급 능력이 고갈된다. 이것을 지켜보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불안한 한국의 주식과 채권을 매도한 결과, 금융자산과 부동산 등 원화 표시 자산들의 가치는 순식간에 폭락을 한다. 그 때 이것을 방어할 우리의 외화보유액은 200억 달러 정도로 외화 수요에 턱없는 수준이었다. 그 뒷일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현재 상황에 비추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은 외환위기 전 3년 간(94-96)의 평균 GDP 성장률이 9% 수준이었고, 98년 한해 –4.9% 역성장을 기록했으나 바로 이듬해 11% 성장을 하여 말 그대로 V형 성장을 보인 사실이다. 한마디로 잘 뛰던 체력 좋은 사람이 한 순간 돌부리(국제 자본이동에 대한 무지)에 채여 넘어졌으나 바로 일어나 다시 질주하는 모습과 같다. 그 때 우리 경제는 그만큼 건강했다.
시한을 하루 앞두고 한미 관세협상은 15% 상호 관세율로 가까스로 타결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경제는 관세충격이 없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수출 감소와 아울러 우리보다 2% 높은 미국의 기준금리로 외화 유출과 원화의 약세가 추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현재 1천926조 원에 이르는 가계부채 규모는 소비 감소는 물론 생산과 투자까지 줄이는 트리플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또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23년 51.5%로 사상최대치를 기록한 이래 경기부진으로 세수는 주는데 신정부의 공약으로 국가 부채비율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협상 이후 몇 가지 위기 시나리오를 들자면, 첫째, 트럼프의 관세정책으로 GDP 대비 수출비중이 36.6%에 이르는 우리나라 수출은 줄어들고 수입은 늘리도록 강제되고 있고, 주요 우회수출 경로였던 중국이나 아세안 국가를 통한 수출도 이들 국가에 대한 고율 관세로 어렵게 된다. 둘째, 자동차의 품목별 관세율은 그간 받아온 무관세 혜택을 감안하면 일본과 EU의 12.5% 관세율이 우리의 마지노선이고 이를 넘으면 자동차 수출은 난망해진다. 셋째, 미국이 요구한 투자 자금(3천500억 달러)은 정부의 부채규모와 기업들의 사정을 보아 어떻게 조달할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넷째, 기업들의 해외이전으로 2030세대의 구직난은 더욱 악화되고 쪼그라든 수출과 가계부채로 4050의 생활고는 눈에 보이는 듯하다. 가장 큰 문제는 97년 외환위기 때처럼 현재 우리가 직면한 경제상황과 관세협상의 결과를 극복할 체력이 남아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다. 작년 2% 올해는 0.8% GDP 성장률에 20%가 넘는 고령자 인구를 가지고 그 때만큼의 회복탄력성을 가질 수는 없다는 비관적인 마음이 드는 것은 기우인지 모르겠다. 정부는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제 환경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국가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은 한 정부의 성패와 국가의 역사적 성패가 맞물리는 묘한 시점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