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지난 7월,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는 '베를린 필 12 첼리스트'의 무대가 열렸다. 현악기의 중심이자, 낮은 음역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악기로서 첼로는 연주자의 심장에 가장 가까이 자리한다. 연주자와 악기가 서로를 껴안아 하나의 원이 되고, 12개의 악기가 반원을 그리며 앉아 연주가 시작되면, 이는 마치 대지의 기운이 생동하는 순간이며 원형의 시간이 내 안에 깊이 들어와 반달처럼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첫 곡은 첼로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하는 율리우스 클렝겔의 '열두 대의 첼로를 위한 찬가 Hymnus'다. 여기에는 외경의 감정도, 과장된 제스처도 없다. 하지만, 그 존재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감정의 선율을 감지하노라면 푸근하고 감미롭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슬픔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열두 대의 첼로가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는 음악이라기보다 차라리 기도의 형식에 가깝다. 그 기도는 깊은 바다의 향유고래 울음처럼 슬픔과 고요를 동시에 머금고,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스치는 바람처럼 숨과 결을 바꾸며 내면의 사막을 쓸고 지나간다. 알 수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대지의 울림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하늘의 소리가 바이올린, 인간의 소리가 피아노라면, 첼로는 땅 아래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소리이며, 가장 원초적인 언어에 속한다.
나는 첼로의 A현과 C현, 그 서로 다른 숨결의 공존을 사랑한다. 맑고 투명하면서도, 때론 유리처럼 날카로운 감각의 A현. 가장 저음의 C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붙잡고, 오래된 나무처럼 깊고 단단하다. 날 선 긴장과 깊은 평온, 날카로움과 부드러움. 이 상반된 감각이 하나의 사물이자 마음, 하나의 생명 안에서 피어오른다는 사실은 새삼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윽하고 신비로운 소리로서 그것은 하나의 현음(玄音)이며. 코라(chora)인 셈이다.
이 날의 무대는 말그대로 '오케스트라의 오케스트라'다. 금관의 위엄, 목관의 따스함, 타악의 리듬, 현악 독주의 섬세함까지. 하나의 악기군이 이토록 풍부하고 드높은 음악의 세계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무대 위의 첼리스트들은 각자 고유의 음과 색을 지닌 존재이면서도, 서로를 감싸고 받쳐주는 하나의 음악 공동체다. 누구도 그 중심에 서지 않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마치 아서왕의 12명 원탁의 기사들처럼, 지위의 고하 없이 상호 존중과 조화 속에서 음악의 꽃은 피어나 절정을 이룬다. 기교의 우열이나 과시가 아니라, 경청과 기다림의 미학으로서 완성되는 이 음악은 연주를 넘어 삶의 기술이며, 그야말로 '열두 대의 첼로를 위한 (생명과 대지의) 찬가'로서 존재한다.
공연을 관통한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단연, Subtlety. 섬세하고 미묘하며, 날카롭고 치밀한 그것이다. 세련된 테크닉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존재와 존재 사이를 사유와 감각으로 이어주는 묵시적 언어의 층위이자, 공명(共鳴)-공진(共振)의 시간이다. '세상과 이어지는 방식으로서 공명은 관계 속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12개의 첼로, 12개의 심장, 그리고 첼로의 숲. 이것이야말로 오래전부터 내가 꿈꿔오던 나의 버킷리스트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첼로의 소리는 내 안에서 오래도록 진동한다. 말로는 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자리, 그 깊은 침묵의 틈바구니에 음악은 있다. 그날 내 안에 새겨진 빛과 소리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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