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우리는 지금, 하늘과 땅이 단절된 세계에 살고 있다. 물질과 영은 분리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른 실재처럼 여겨지며, 과학과 종교는 양립 불가능의 영역으로 갈라져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런 분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몸과 교회에서 구원받는 영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본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구성된 하나의 인식 틀, 곧 프레임이다. 17세기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며 형성된 이 프레임은 불과 몇 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이것이 인류가 항상 가져왔던 보편적 사고방식인 것처럼, 또는 진보된 사고방식인 것처럼 믿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분법은 사실 자명하지 않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 자연과 초자연, 이성과 감정과 같은 구분을 마치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범주인 것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범주들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근대)에서 형성된 것이며, 다른 문화와 시대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나누고 이해했다. 근대 이전의 인류는 세계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았다. 우주와 인간,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연속체를 이루며 서로 공명하고 있다고 믿었다. 별의 움직임이 인간의 운명과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고, 세계는 많은 의미와 상징들의 그물망으로 촘촘히 짜여져 있었다.
점성술이나 사주팔자 같은 점복학도 마찬가지다. 현대인은 항상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를 묻는다. 출생 차트를 보며, '어떻게 태어난 시간의 별자리가 성격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묻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미 인간과 우주가 분리된 존재이고, 별들은 단순한 물질 덩어리며, 영향력은 오직 중력 같은 물리적 힘만으로 전달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전제 자체가 근대적 산물이다.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계몽주의의 탈주술화. 이런 사상적 전환들이 점성술이나 종교, 많은 이전의 믿음들을 '미신'의 영역으로 밀어냈다. 이게 단순한 지적 오만인 것만은 아니었다. 17세기 유럽은 종교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야 했고, 교회의 권위로부터 벗어난 진리의 토대를 필요로 했다. 게다가 이런 접근은 놀라운 성과를 낳았다. 증기기관을 만들고, 질병을 치료하는 힘. 자연을 대상화하고 분해함으로써 얻은 이 통제력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와 안전을 약속했다. 의미를 묻기보다 작동 원리를 규명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었고, 영적 교감보다 인과법칙이 더 믿을 만했다.
그렇게 우주는 거대한 시계장치가 되었고, 별들은 무의미하게 떠도는 바위덩어리가 되었다. 인간의 내면과 우주의 리듬 사이의 공명은 상상력의 산물로 치부되었고, 천체의 움직임과 인간사의 연관성은 우연의 일치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그게 맞는 걸까? 우리는 우주의 물리적 법칙들을 정확히 계산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왜 우리가 이 우주에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답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환원하면서, 혹시 측정 불가능한 것들 속에 있던 본질적인 무언가를 함께 버린 것은 아닐까?
현대의 우리가 더 이상할 수도 있다.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고, 의미를 제거한 우주를 상정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의미를 박탈당한 우주에서, 우연의 집합체로 환원된 삶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의미를 갈구한다. 사주를 보고, MBTI로 자기를 이해하려 하고. 어쩌면 이런 모순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특별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 아닐까. 우리의 합리성 역시 하나의 렌즈에 불과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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