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혜경 한동대 부총장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건, 지켜야 할 명예가 높아지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높은 사람들'은 과연 그에 걸맞은 명예를 지키고 있을까? 왕관을 쓰면 권력이 모든 것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진짜 리더는 권력이 아니라 명예로 기억된다.
권력의 정점에 선 사람일수록 더 많은 특권을 누려왔고, 우리 사회도 이를 어느 정도 그냥 넘어가 주었다. 자녀 입시 비리와 군 면제 의혹, 부동산 투기와 공직자 윤리법 위반… 그리고 이어지는 거짓말들. 책임은커녕, 솔선수범은 이제 낡은 이야기쯤으로 취급된다. 그러니 국민이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들의 삶에서 '명예'와 '책임'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 왕족들은 지금도 국민 앞에서 책임과 헌신을 증명한다. 영국 윌리엄 왕세자는 공군 구조헬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수십 차례 생명을 구했고, 해리 왕자는 두 차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돼 직접 헬기를 몰았다. 왕자라는 특권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국민을 위한 봉사자로 훈련받은 결과다.
'로열 리더십'에는 성별의 구분도 없다. 스페인 왕위 계승 1순위 레오노르 공주는 육·해·공군 사관학교에서 3년에 걸쳐 군사 훈련을 받고 있으며,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공주도 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다른 생도들과 함께 행군·사격·위장훈련을 똑같이 소화했다. 드레스 대신 전투복을 입고, 의전 대신 진흙 속에서 구르는 모습은 "지위만큼 책임도 진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살아있는 교과서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전통은 존재했다.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 박사는 기업의 전 재산을 사회와 교육에 환원하며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철학을 남겼다. 의료계에서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장기려 박사가 평생 가난한 환자를 섬기며 무보수 진료와 사회운동을 이어갔다. 한 사람은 기업을 통해, 다른 한 사람은 의술을 통해, 특권을 책임으로 바꾸고 명예를 삶으로 보여주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국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책임을 외면한 권력은 무너지고, 탐욕은 공동체의 신뢰를 붕괴시킨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했다. 로마 제국의 몰락, 프랑스 혁명, 오늘날 민주국가의 정치 불신까지 그 뿌리는 언제나 '특권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 자들'이었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진짜 리더는 불편을 감수하고, 희생을 받아들이며, 책임을 짊어진다. 그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질이다. 왕관은 벗으면 끝이지만, 명예는 영원히 남는다. 품격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빛이다.
리더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법으로 강제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태도이며, 국민에게 신뢰받는 유일한 길이다. 먼저 한 발 내려서서 섬기는 리더, 흙먼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품격의 리더, 왕관보다 빛나는 명예를 품은 리더. 그 한 사람이 국가의 품격을 세우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다.
이제 한국 사회가 되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 명예의 유산이다. 국민은 특권을 누리는 지도자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며 명예롭게 서는 품격의 리더를 원한다. 가정과 학교에서 길러진 작은 책임의 습관이 모여 명예를 아는 미래 지도자를 세우고, 그 리더십은 곧 국가의 품격을 높일 것이다. 왕관보다 빛나는 명예, 그것이 곧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다시 세워야 할 가치이자, 미래 세대 앞에 지켜야 할 우리 모두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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