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2025년 6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는 전 세계를 뒤흔들며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고 있다. 미국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하고, 넷플릭스가 배급한 이 작품은 전 세계를 호령하는 K-POP 걸그룹 '헌트릭스(Huntrix)'가 사실은 악마 사냥꾼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 이야기를 다룬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독창적이다. 헌트릭스 멤버들은 음악과 공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선사하고, 그 에너지가 악령을 봉인하는 결계 '혼문(魂門)'의 힘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어두운 세력인 악령 라이벌 보이밴드 '사자 보이즈'와의 치열한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리더 루미는 악령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깊은 내적 갈등에 빠지지만, 끝내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팀과 팬들의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한다.
그런데,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한 음악 영화가 아니다. 한국 전통의 '저승사자'와 '혼문' 같은 요소를 현대 판타지와 K-POP 세계관에 결합해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차별화된 콘텐츠로 재탄생된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소니가 수년간 추진해온 멀티 콘텐츠 IP 전략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작품 속 루미와 헌트릭스가 혼란 속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해 악령을 물리치듯, 소니 또한 전통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미디어와 시장에 적응해 혁신과 성장을 이루었다. 소니는 음악, 애니메이션, 영상, 공연 등 다양한 형태로 콘텐츠를 다각화하고, 넷플릭스와의 협업으로 글로벌 배급망을 확보했다. 이는 전통 제조업체의 한계를 넘어선 외연 확장의 상징적 성과로 평가된다.
한때 소니는 혁신의 대명사였다. 워크맨이 음악 소비 문화를 바꾸고, 플레이스테이션이 게임 산업을 정의하던 시절, 소니는 전자 업계의 왕좌에 있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0년대 후반 이후 소니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과 애플, TV 시장에서는 LG와 TCL 등에 밀리며 전자부문의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그나마 소니를 지탱한 것은 영화와 음악, 그리고 게임이었다. 하지만 이들 부문만으로는 그룹 전체의 침체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평안했던 시절의 기억은 빠르게 사라지고,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상황에서 소니는 '거안사위(居安思危)', 즉 평안할 때도 위기를 생각하라는 철학을 실천하며 완전히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였다. 이 작품이 전 세계인의 심장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예술성과 보편적 문화적 공감 덕분이지만, 그 이면에는 소니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고통스러운 자기 반성과 전략적 대비를 이어온 과정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경영진의 결단이 있었다.
히라이 가즈오에 이어 2018년 CEO로 취임한 요시다 켄이치 회장은 장기적인 관점과 목적 중심의 리더십을 강조하며, '창의성과 기술의 힘으로 세상을 감동으로 채운다'는 미션 아래 각 사업부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One Sony'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인 큰 그림을 우선시했다. 그는 탁월한 소통 능력과 객관적인 판단력을 바탕으로 조직 내 신뢰를 구축했으며, 이를 통해 부실 사업의 과감한 철수와 동시에 게임·음악·영화 IP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많은 기업들이 단기 실적에 집착해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반면, 요시다 체제의 소니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소니는 전자제품 시장의 파고에 휩쓸리기보다는, 다가올 '경험경제' 시대를 준비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리더십은 단순히 회사를 관리하는 경영 능력에 머무르지 않는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시대를 해석하는 통찰력, 미래를 예측하는 용기, 그리고 조직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실행력이다. 요시다 켄이치가 보여준 소니의 변화는 미래를 여는 리더십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성공은 그가 추구한 철학이 현실에서 빛을 발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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