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추 거문고 이야기] <40> 백거이와 거문고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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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12 06:00  |  발행일 2025-09-11
중국 시안의 화청궁 내 장생전(長生殿).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당 현종과 양귀비가 칠월칠석 날 장생전에서 비익조가 되고 연리지가 되기를 맹세했다고 노래했다.

중국 시안의 화청궁 내 장생전(長生殿).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당 현종과 양귀비가 칠월칠석 날 장생전에서 비익조가 되고 연리지가 되기를 맹세했다고 노래했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772~846)는 두보·이백과 함께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자는 낙천(樂天)이고, 백낙천으로 많이 불린다.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산(香士居山)라고 칭했다. 백거이 역시 거문고를 매우 좋아해 58세가 되던 해, 시(詩)와 술(酒)과 거문고(琴·칠현금)를 삼우(三友)로 삼아 스스로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나날을 보냈다.


백거이는 29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35세 때 자신의 대표작이 된 '장한가(長恨歌)'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장한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주제로 만든 시다. '장한가'에는 '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했고(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랐지(在地願爲連理枝)'라는 구절이 있다. 비익조와 연리지를 사랑의 비유로 사용한 이후 '비익연리(比翼連理)'란 사자성어가 되어 애용되어 왔다. 9년 후인 815년에는 좌천 생활 중 우연히 여성 비파 연주자의 슬픈 사연을 듣게 되면서 '비파행(琵琶行)'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당나라 시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게 된다.


◆'북창삼우(北窓三友)' 중 하나 거문고


백거이가 관직에서 물러나 '거문고, 술, 시'를 '세 친구'로 삼아 한가롭고 즐거운 생활을 즐기며 지은 시 '북창삼우(北窓三友)'를 보자. 우선 앞부분이다.


'오늘 북쪽 창 아래에서(今日北窓下)/ 무엇을 하느냐고 스스로 물어보네(自問何所爲)/ 기쁘게도 세 친구를 얻었으니(欣然得三友)/ 세 친구는 누구인가(三友者爲誰)/ 거문고를 뜯다가 문득 술을 마시며(琴罷輒擧酒)/ 술을 마시다 문득 시를 읊네(酒罷輒吟詩)/ 세 친구가 번갈아 서로를 이끌어주니(三友遞相引)/ 돌고 도는 것이 끝이 없네(循環無已時)/ 칠현금을 한번 타면 마음속까지 흡족해지고(一彈愜中心)/ 시 한 수 읊으면 온 몸이 편안해지네(一咏暢四肢)/ 그 사이에 감흥이 끊어질까봐(猶恐中有間)/ 잔에 술을 채워 그 사이를 없애주네(以酒彌縫之)'.


이어 세 가지를 벗으로 삼은 것은 각각 스승으로 삼은 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설명한다. 동진의 전원시인 도연명, 춘추시대의 은사(隱士)로 거문고(칠현금) 연주에 뛰어났던 영계기(榮啓期), 위진(魏晉)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으로 술을 특히 좋아하고 '주덕송(酒德頌)'을 남긴 유령(劉伶)이 그들이다.


'졸렬한 것을 좋아한 사람 어찌 나뿐일까/ 옛날에도 이런 사람 많이 있었네/ 시를 좋아했던 사람 도연명이 있었고/ 칠현금 좋아했던 영계기가 있었으며/ 술 좋아했던 사람으로는 유령이 있었으니/ 그 세 사람 모두 나의 스승이라네/ 누구는 모아둔 게 곡식 항아리뿐이고/ 누구는 노끈을 허리띠로 쓰지만/ 칠현금 뜯고 술 마시고 시를 지어 읊으며/ 인생을 즐기는 도를 잘 알고 있네/ 세 스승은 이미 멀리 가버렸고/ 그 높은 풍격은 따를 수 없지만/ 세 벗과의 교유가 지극이 돈독하여/ 하루라도 함께 놀지 않는 날이 없다네'.


이백이나 두보에게도 거문고는 늘 가까이 두며 즐기고자 한 벗이었다. 이백은 시 '산중대작(山中對酌)'에서 '나는 이제 취해 자고 싶으니 그대는 돌아가시구려, 내일 아침 다시 생각나거든 거문고를 안고 오시게(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라고 읊었고, 두보는 '야연좌씨장(夜宴左氏莊)'에서 '바라 부는 숲에 초승달 떨어지고, 이슬 젖은 옷자락에 거문고 소리 맑다(林風纖月落 衣露淨琴張)'라고 노래했다.


◆소나무 아래 거문고 하나면 족하네


백거이는 '금차(琴茶)'라는 시에서도 일상생활에서 거문고와 차(茶)를 가까이하며 한가로움을 즐기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정성껏 만물 속에 기대어(兀兀寄形群動內)/ 즐겁게 성정대로 일생 보내네(陶陶任性一生間)/ 스스로 관직 버린 후부터 봄이면 자주 취하고(自抛官後春多醉)/ 책 보지 않으니 늙어 더 한가롭네(不讀書來老更閑)/ 거문고 가락에서 알아듣는 건 녹수곡뿐(琴裡知聞唯淥水)/ 차 중에 오랜 벗은 몽산차라네(茶中故舊是蒙山)/ 궁하고 통하며 행하고 쉬는 일 항상 함께 하니(窮通行止常相伴)/ 나 지금 오갈 데 없다 말 할 수 있으리오(難道吾今無往還)'.


'연못이 보이는 창'이라는 의미의 '지창(池窗)'이라는 시도 마찬가지다. '저무는 연못에 연꽃향기 흩날리고(池晩蓮芳謝)/ 가을 창가에 대나무 정취 깊어라(窓秋竹意深)/ 둘러봐도 함께 거닐 사람이 없고(更無人作伴)/ 오직 거문고 하나 마주하고 있네(唯對一張琴)'.


백거이는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지금 여산의 신령스럽고 뛰어난 경치가 나를 부르고 있어 마침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니, 앞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면 왼손으로는 가족을 이끌고, 오른손으로는 거문고와 책을 안은 채 여산으로 가서 만년을 보내며 나의 평생소원을 이루고야 말겠다. 여산의 맑은 샘과 하얀 돌도 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는 46세에 장시성(江西省)의 여산(廬山) 향로봉 아래 초당을 마련한 뒤 '향로봉 아래에 초당을 지어(香爐峯下新置草堂)'라는 시를 읊었다. 이 작품에 나오는 구절이다. '평생토록 좋아하는 것이 없다가/ 이곳을 보고 마음이 흡족했다/ 마침내 늙어 죽을 곳을 얻은 듯하여/ 갑자기 돌아갈 마음이 없어져 버렸지/ 바위 사이 가로 질러 작은 초가 하나 마련하고/ 골짜기를 파서 차밭을 일구었지/ 어디 가서 나의 귀를 씻을 것인가/ 다행히 처마머리에서 날아 떨어지는 샘이 있네/ 어디 가서 나의 눈을 씻으리오/ 섬돌 아래에는 백련이 자라는 구나/ 왼손에는 술 한 병을 들고/ 오른손에는 거문고 들고 다니며/ 뿌듯한 마음으로 흡족해하네'.


'송재에서 스스로 짓다(松齋自題)'라는 시 중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배만 채우면 모두가 맛있는 음식이요/ 무릎만 들여놓으면 편안한 거처이다/ 하물며 소나무 서재 아래에서/ 거문고 하나와 몇 질의 책이 있음에야/ 책을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거문고도 적당히 스스로 즐긴다네'.


'밤은 차가운데(夜涼)'라는 시에서도 거문고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엿볼 수 있다. '흰 이슬, 맑은 바람, 싸늘한 뜰/ 늙은이가 가장 먼저 겹옷 입는다/ 무희와 가수들 어디에 버려두고/ 다만 줄 없는 거문고를 바라 본 뿐'.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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