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대구, 문화예술 도시의 자존심 회복해야 할 때

  • 정일균 대구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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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15 14:44  |  발행일 2025-09-15
정일균 대구시의원

정일균 대구시의원

도시는 결국, 이야기로 기억된다. 브로드웨이가 있는 뉴욕, 샹송이 흐르는 파리, 모차르트의 선율이 울려 퍼지는 빈처럼, 한 도시의 예술과 문화는 그 도시의 얼굴이자 정체성이다.


문화는 도시를 특별하게 만들고, 사람을 머물게 하며, 세계와 연결되는 힘이 된다. 그렇게 축적된 스토리는 도시를 넘어 국가의 문화력을 키우는 자산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구는 분명 그런 도시였다. 시와 음악, 무대와 붓으로 시대를 이끌던 문화예술의 중심지. 그러나 지금 그 자부심을 지켜내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오늘의 언어로 이어가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대구는 오랜 시간 한국 근대예술의 발원지이자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이상화, 박태준, 이인성, 현진건 등 한국 근대 예술의 선구자들이 대구에 뿌리를 두고 창작의 불을 지폈다. 1930년대엔 신극운동의 거점으로, 이후에는 음악, 미술, 문학, 무용, 공연예술 등 각 장르를 선도하는 문화도시로 자리매김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대한민국 최초의 오페라 제작극장이며, 대구국제오페라축제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은 지역을 넘어 한국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구의 문화예술은 위기의 문턱에 서 있다. 대구 문화예술계에 깊은 상처를 남긴 코로나19 이후, 이제 겨우 회복의 숨을 고르려는 시점에 대구시는 연이은 예산 삭감으로 다시 문화의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최근 2년간 지역문화예술지원 예산은 큰 폭으로 줄었고, 특히 창작 기반이 취약한 청년 예술인들이 가장 먼저 현장을 떠나고 있다. 이들의 이탈은 단지 개인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창작 인프라와 미래 세대의 문화 토대를 송두리째 흔드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지금 대구는 청년 예술인을 지키지 못하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 공백은 고스란히 문화의 쇠퇴로 이어지고 있다.


예산 축소의 영향은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대구시 문화예술의 핵심 역할을 해야할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은 통합 이후 조직은 비대해졌지만, 정작 예술 현장을 향한 지원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장르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통합 운영은 창작자의 자율성을 해치고, 현장의 목소리를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본래 창작을 돕고 예술 생태계를 조성해야 할 기관이 오히려 예술을 주변으로 밀어내는 구조가 돼가고 있다.


대구의 문화정책은 이제 숫자보다 방향을, 성과보다 지속을 고민해야 할 시점에 있다. 문화는 사람이 만들고, 예술은 현장에서 자란다. 행정이 문화의 주체가 돼서는 안 된다. 행정은 예술인의 뒤에서, 시민의 곁에서 조용히 그 토대를 지지해야 한다. 사람과 현장을 먼저 바라보는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때 서울과 나란히 공연예술의 쌍두마차로 불렸던 대구는 이제 인프라, 인재, 정책 실행력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울과 부산을 뒤쫓는 입장에 놓여 있다. 서울은 이미 글로벌 콘텐츠 허브로서 공공·민간 협력 기반의 문화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으며, 지속가능한 창작 시스템을 통해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해가고 있다. 부산의 움직임도 인상적이다. 지난 6월 개관한 클래식 콘서트홀과 2027년 개관을 앞둔 초대형 오페라하우스는 'K-클래식'의 중심지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정명훈 예술감독의 영입과 콘텐츠 중심의 투자 확대는 공연예술 분야에서 대구보다 한 발 앞서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브로드웨이에서 울려 퍼진 한국 창작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성공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작품은 300석짜리 소극장에서 출발해 민간 창작지원과 해외 전략, 현지화 작업을 거쳐 2025년 토니상 6관왕이라는 전례 없는 성과를 거뒀다. 이 성과의 핵심은 단순히 '작품성'이 아니다. 창작자의 자율성, 민간의 신뢰, 행정의 지속적이고 겸손한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이야말로 방향을 바꿔야 할 시점이다. 지원의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잡고, 예산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고, 예술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맡겨야 한다.


이야기로 기억되는 도시, 예술이 숨 쉬는 대구. 그 회복을 위해, 대구시는 예술인을 동반자로 존중하고, 창작의 현장에서 함께 걸어가야 한다. 행정이 곁을 지킬 때, 예술은 다시 피어나고, 대구는 다시 문화로 살아 숨 쉬는 도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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