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건 경제전문기자
한국은 현재 미국이 부과한 25%의 고율 관세에 묶여 있다. 2024년 기준으로 한국의 대미(對美) 무역 흑자는 1천182억달러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세는 산업 전반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미칠 수밖에 없다. 양국 정상은 지난 7월 이 부담을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미국에 3천500억달러(한화 약 482조4천억원) 규모 투자를 약속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여러 민감한 쟁점을 두고 양측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협상이 지연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투자 방식이다. 미국은 한국이 전액을 특수목적기구(SPC)에 현금 출자하길 원하지만, 이 경우 사업 실패 시 손실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 그래서 한국은 대출, 보증, 출자를 혼합해 위험을 분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출은 원금 회수 가능성이 크고, 보증은 실제 현금 유출이 제한적이며, 출자는 손실 위험이 있지만 성장성과 수익성 확보 여지가 있다. 결국 전액을 SPC에 묶는 것보다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반면, 미국의 요구대로 직접투자만으로 3천500억달러를 감당하는 것은 외환보유액과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줄 수 있다. 한국은 만약 이 조건을 받아들일 경우 막대한 달러 유출이 환율 급등과 외환시장 불안으로 직결될 것을 우려해 사실상 '달러 마이너스 통장' 역할을 하는 무제한 한·미 통화스와프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비기축통화국과의 상설 통화스와프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실제,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약 4천100~4천200억달러 수준이며 미국이 요구한 투자금은 외환보유액의 약 84%에 이른다. 정부 측은 연간 실질 조달 가능액이 200~300억달러 수준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다음으로 미국은 반도체, 의료, 인프라 등 전략산업을 자신들이 지정하고, 여기에 한국 자금을 투입하길 원한다. 일본과 협상할 때도 이런 방식을 택해 사실상 미국이 협상을 주도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한국은 이 방식에 동의하기 어렵다. 일방적으로 미국이 지정하는 사업만 따라 간다면 특정 산업군에 편중돼 있는 한국 기업은 대규모 적자 프로젝트 등의 리스크만 떠안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 맺은 협상을 근거로 원금 회수 전에는 수익을 50대 50, 회수 후에는 90대 10으로 가져 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불리한 조건이다. 특히 원금 회수 이전에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보장받아야 정치적, 경제적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협상이 쉽게 끝나기 어렵다. 더구나 국내 여론은 일본식 모델 수용을 '굴욕 협상'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상대적으로 신속히 합의할 수 있었던 배경을 보면 한국과의 입장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은 5천500억달러라는 더 큰 투자금을 요구받았지만 1조3천000억달러가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외환보유액 덕분에 이를 감당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또 엔화가 국제시장에서 준(準)기축통화로 통용되며 달러 유동성 확보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도 일본의 강점이다. 무엇보다 서태평양에서 급성장한 중국 해군을 최전선에서 상대해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미국 의존도가 절실해서 미국의 요구를 외교적 보상 차원에서 수용할 여지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미국이 지정한 전략산업에 자금을 그대로 투입하며 주도권보다는 대미 관계 안정에 무게를 실었다. 결국 같은 요구라도 일본은 흡수력이 있었던 반면 한국은 정치, 경제적 제약이 훨씬 더 크다는 점이 본질적 차이다.
앞으로 투자 비중과 방식, 수익 배분에서 양국이 전반적으로 절충안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합의가 지연되면서 일부만 조건부로 시행하는 경우다. 당장 관세는 15%로 되돌리되 투자 구조와 수익 배분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는 방식이다. 이런 경우 불확실성이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의 대미 투자 계획이 줄줄이 보류될 수 있다. 양측 모두 정치적으로 완패를 선언할 수는 없는 만큼, 겉으로는 유리한 성과를 부각하고 속으로는 후속 협상을 이어가는 절반짜리 합의가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서로 다신 안 볼 듯 배수진을 치고 강경하게 밀어붙일 수도 없다. 결국 서로가 똑같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협상은 완전한 결렬보다는 불완전한 타협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과정에서 외환시장 불안과 기업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부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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