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혜경 한동대 부총장
가는 곳마다 AI가 화제다. 인간의 언어를 모방하고, 지식을 처리하며, 창의적 작업까지 흉내 내는 AI는 공상과학을 넘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질문은 "AI가 어디까지 가능할까?"에서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다움은 무엇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이는 기술적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물음이다.
근대 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정의했다. 데카르트의 선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오랫동안 인간 정체성을 설명하는 구호였다. 그러나 AI가 사고와 연산, 디자인 작업까지 대신할 수 있는 지금, 인간의 존재 근거를 단순히 이성에만 둘 수는 없다. 오히려 인간다움은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인간을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만드는 인간) 등으로 시대마다 인간의 고유성을 강조했지만, 이제 AI가 '생각'과 '놀이', 심지어 '도구 제작'까지 넘보는 시대에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신학은 더 깊은 답을 건넨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전지전능한 능력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책임을 지며 무엇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AI는 무한히 지능적일 수 있어도 믿음과 희생, 사랑을 진실로 살아낼 수는 없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힘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을 호모 아만스(Homo Amans), 사랑하는 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문명사의 전환점마다 교육은 인간다움의 본질을 길러왔다. 고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paideia)는 영혼을 기르는 훈련이었고, 중세의 보편학(Artes Liberales)은 인간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지혜를 추구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과학과 기술 중심의 지식 교육은 종종 인간을 소외시켰다.
AI가 지식을 압도적으로 제공하는 지금, 교육 또한 새로운 정의를 필요로 한다. AI 리터러시와 윤리교육을 통해 기술을 어떻게 책임 있게 활용할 것인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와 연대 훈련을 통해 AI가 강화하는 초개인화의 흐름을 넘어 협력과 책임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예술·철학·종교·인문학 같은 고유의 영역을 심화시켜, 기계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인간성의 깊이를 길러야 한다. 다시 말해, 교육은 지식을 넘어 온전한 사람을 빚어내는 과정이어야 하며, AI 시대의 교육은 '호모 아만스', 사랑하는 인간을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AI는 지식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사랑과 영혼의 성숙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AI의 발전은 인간 퇴출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의 본질을 새롭게 확인하는 기회다. AI는 우리를 위협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의 참된 가치를 더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상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아만스(Homo Amans), 곧 사랑하는 인간이다. 지식보다 사랑이, 경쟁보다 연대가, 개인보다 공동체가 미래를 이끈다. AI 시대에도 진리는 변함없다. 인간은 사랑할 때 가장 인간답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며 기억된다.
그래서 오늘, 더 크게 고백하자. "우리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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