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속도의 시대, 신뢰는 잠시 멈춘다

  •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 |
  • 입력 2025-11-10 06:00  |  발행일 2025-11-09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지금은 '클릭의 시대'다. 몇 번의 클릭이면 모르는 사람의 집에 머물 수 있고, 낯선 이의 차에도 거리낌 없이 오른다.


얼마 전 일본 여행에서도 항공권과 숙소 예약, 교통 패스까지 모두 손끝으로 해결됐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는 종이표 대신 QR코드로 입장했고, 비행기 탑승도 휴대폰 화면 하나면 충분했다. 여행의 모든 과정이 매끄럽게 흘렀지만, 마음 한편에는 낯선 불안이 남았다.


왜일까. 그 불안은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쉽게 믿게 된 데서 오는 불안이었다. 눈앞에서 확인한 것도 아닌데, QR코드 하나로 결제와 입장이 이루어지고,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나를 대신해 모든 절차를 처리해준다.


이런 모든 과정은 '신뢰'를 전제로 작동하지만, 그 신뢰는 인간의 눈빛이나 말이 아니라 시스템과 알고리즘이 대신하고 있다. 편리함이 완벽할수록 믿음은 기술의 손에 맡겨버린 듯했다. 보이지 않는 시스템을 믿으며 살지만, 정작 무엇을 믿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의문은 여행길에서 뜻밖의 순간에 현실이 되었다.


여행길에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기가 버거워 전철역 사물함에 맡기려 했는데, 화면이 멈추고 잠금장치가 반응하지 않았다. 당황한 순간, 손끝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때 함께 있던 동료가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 다시 해보세요, 괜찮을 거예요." 그 한마디에 마음이 풀렸다. 잠시 후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물함이 잠겼다. 완벽한 시스템보다 사람의 목소리가 더 큰 안도감을 줬다. 그제야 알았다. 기술이 신뢰를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신뢰를 완성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런 깨달음도 잠시였다. 세상은 이미 사람의 목소리보다 기계의 신호음을 더 자주 듣는다. 신뢰의 주체가 사람에서 기술로 옮겨간 것이다. 우리는 이제 '평판'과 '별점'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사람을 평가하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거래를 한다.


알고리즘이 신뢰의 기준이 된 시대, 신뢰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런 변화를 레이첼 보츠먼은 '신뢰이동'이라 불렀다. 그는 "신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동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관계의 신뢰에서 제도와 기술의 신뢰로 옮겨왔지만, 그 안에서 책임과 온기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이제는 평판이 신뢰를 대신하고, 속도가 관계보다 앞서가고 있다.


한 달 전, 온라인에서 절판된 책을 중고로 구입했다. 약속 장소는 번화가의 카페가 아닌 조용한 골목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 알 수 없는 얼굴, 확인할 수 없는 책의 상태. 작은 불안이 스쳤지만, 나는 '신뢰 휴지(Trust Pause)'를 떠올리며 마음을 고요히 했다.


"그래, 나처럼 이 책을 아끼는 사람일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기다리자, 낯선 이가 웃으며 책을 내밀었다. 퇴직한 선생님이라는 그녀는 "이 책을 좋아하는 분을 만나 다행이에요"라며 미소 지었다. 커피 얼룩이 남은 종이에서 묘한 온기가 전해졌다. 클릭으로 시작된 신뢰가 사람의 온도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속도의 세계에서 느림은 결함이 아니라 품격이다. 기술이 아무리 앞서도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면 신뢰는 공허하다. 신뢰란 결국 '속도의 세계에서 잠시 멈춰 설 줄 아는 용기'다. 평가와 알고리즘이 대신 결정해주는 세상일수록 우리는 더 자주 '신뢰 휴지'를 가져야 한다. 사람을 믿을지, 기술을 믿을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그 선택이 인간이 기계보다 앞설 수 있는 마지막 능력일지도 모른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