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독립투사 박희광 선생 재조명 “업적 돌아보고 서훈 상향 고민해야”

  •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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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1-16 18:28  |  발행일 2025-11-16
12일 한국보훈포럼이 주최한  80주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 보훈학술세미나에서 이태훈 달서구청장이 인삿말을 하고 있다. <박희광 선생 기념 사업회 제공>

12일 한국보훈포럼이 주최한 '80주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 보훈학술세미나'에서 이태훈 달서구청장이 인삿말을 하고 있다. <박희광 선생 기념 사업회 제공>

박희광 선생. <박희광 선생 기념 사업회 제공>

12일 한국보훈포럼이 무명의 독립투사에 대한 공적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한국보훈포럼이 주최하고 박희광 선생 기념 사업회가 주관한 '80주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 보훈학술세미나'에서는 학계, 지역정계 관계자 등과 박희광 선생에 대한 업적에 대해 논의했다.


이원호 상화기념관장의 사회로 진행된 학술대회에는 김태열한국보훈포럼 회장, 이태훈 달서구청장과 박희광 선생의 유족 등이 참석했다. 또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과 강은희 대구시교육감이 축사를 전했다.


박희광 선생의 활동과 서훈 상향 등 재평가에 대해 경북대 장문선 교수를 좌장으로 영남이공대 김태열 교수, 박언휘 노화방지연구소장의 발표와 토론 시간을 가졌다.


한편, 박희광 선생은 1901년 구미에서 태어난 선생은 만주로 이주한 뒤 1922년 '박상만'이라는 가명으로 친일 세력 토벌에 나섰다. 1923년 고등계 첩자 정갑주 부자를 처단했고, 이어 보민회를 습격해 일진회 핵심 최정규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체포됐다.


1924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미성년자 신분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18년 6개월의 옥고 끝에 1943년 출옥했다. 광복 후에 백범 김구 선생의 경호 임무를 맡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1970년 서거했으며,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을 추서해 그의 공훈을 기렸다.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선생의 흉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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