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신선들이 사랑한 관(冠)이 향기로운 사슴들

  •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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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2-06 06:00  |  수정 2026-02-06 15:44  |  발행일 2026-02-06
윤두서, 심산지록, 종이에 수묵, 127.0×90.5㎝, 간송미술관 소장

윤두서, '심산지록', 종이에 수묵, 127.0×90.5㎝, 간송미술관 소장

잘생긴 소나무 숲을 걷는다. 멀리 팔공산이 왕관처럼 우뚝 솟았다.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며 간송미술관으로 들어섰다. 붓질이 매끄럽지 않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 미술관에서 답을 찾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왕관을 쓴 사슴이 나를 반긴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대작 '심산지록(深山芝鹿)'이다. 화가의 세심한 붓질에 무릎을 꿇는다. 감탄하며 그림 속으로 빨려든다. 사슴의 해맑은 눈빛에 이끌려 또 다른 사슴을 찾아 길을 나선다.


◆깊은 산속의 신령스러운 사슴처럼


사슴은 큰 눈망울에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 숲의 왕이라 할 만하다. 두 마리의 사슴 그림을 '쌍록도(雙鹿圖)'라 하고, 여러 마리인 경우에는 '백록도(百鹿圖)'라 한다. 흔히 흰 사슴을 '백록(白鹿)'이라 하는데, 한 마리의 사슴을 '백록(百鹿)'으로 읽어 백 마리의 뜻을 지니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슴은 '복록(福祿)'을 가져다주는 신성한 동물이다. 수컷의 뿔은 일년에 한 번씩 탈각되었다가 새로 돋아나는데, 재생과 장수, 영생을 상징한다.


'심산지록'은 깊은 산 속 영지와 사슴을 뜻한다. 봄비가 그치자 잎이 돋아나고 영지가 고개를 내밀어 반들거린다. 숲을 헤치며 흰 사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지는 신선이 거처하는 곳에서 자라 '서초(瑞草)'로 불린다. 길상을 의미하는 영지와 사슴은 십장생도(十長生圖)나 신선도(神仙圖)의 단골 소재로 귀빈 대접을 받았다.


잡풀은 진한 먹과 연한 먹을 조절하여 하나씩 길게 그렸다. 맨 앞에 영지를 배치하고, 곳곳에 국화를 더했다. 신성한 곳임을 암시한다. 짙은 먹으로 그린 대나무로 인해 사슴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사슴의 털은 한 올씩 그렸다. 화가의 끈기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슴의 갸름한 눈망울이 선하다. 휘어진 측백나무에 검은 점이 깨알처럼 소복하게 쌓여 반짝인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그림을 다 그린 화가는 "무성한 풀숲 영지가 빼어나, 깊은 산속은 색다른 봄빛일세. 중원은 비바람 치는 밤이니, 이곳이 몸을 숨기기 좋으리라. 효언"이라고 적었다. 그림은 화가의 마음을 담는다. 당대 대표적인 학자이자 문인화가였던 윤두서는 당쟁에 휘말려 세상과 등지고 낙향하여 사슴처럼 고고한 삶을 살고자 했다.


화가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화제 아래 학포(學圃)의 화답이 있다. "감히 진(秦)나라 궁전에 들어가, 헛되이 이세(二世)로 망하게 했네. 오록충종(伍鹿充宗)도 오히려 뿔이 꺾였으니, 말을 베는 명검(名劍)이 상방(尙方)에 있었네, 학포가 추가해서 쓰다." 영원할 것 같은 권세도 한순간에 꺾이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생인 것을.


김시, 선록완월, 종이에 수묵, 44×28.5㎝, 간송미술관 소장

김시, '선록완월', 종이에 수묵, 44×28.5㎝, 간송미술관 소장

◆도인과 함께 달을 감상하는 사슴


사슴은 탈속의 세계에서 도인을 보필하는 영물이다. 도교의 신선과 도인을 그린 '신선도'에는 중국 고대 신화 속의 인물이 등장한다. 서왕모, 동왕공, 복희, 여와 등의 전설적인 신들과 8명의 신선들이다. 이들 팔선(八仙)은 종리권, 여동빈, 한상자, 하선고, 조국구, 이철괴, 장과로, 남채화를 포함한다. 신선은 장수와 복록을 상징하는 사슴, 복숭아, 거북이, 학, 영지, 호리병, 두루마리, 박쥐 등을 들고 있거나 옆에 둔다.


불로장생과 복록의 염원이 담긴 신선도는 누구나 선호하였기에 문인화가나 화원 화가들이 즐겨 다룬 화제였다. 신선과 사슴이 달을 감상하는 양송당(養松堂) 김시(金視, 1524~1593)도 '선록완월(仙鹿翫月)'을 남겼다.


사선으로 기운 언덕에 잡풀이 피어 있고, 농묵으로 바위를 그리고 연한 먹으로 배경을 처리했다. 고개를 치켜든 사슴 눈이 달처럼 동그랗다. 진한 먹으로 털을 묘사했고, 물방울 무늬로 입체감을 주었다. 달을 보는 신선의 눈도 달처럼 둥글다. 흰 수염이 도력(道力)을 풍긴다. 진하고 굵은 선으로 옷깃과 소매를 그렸다. 빠른 필치로 표현한 옷자락이 풍채를 살린다. 지팡이를 짚고 선 도인은 사슴과 함께 보름달을 감상 중이다.


신선도에는 장수의 화신인 수성노인(壽星老人)이 많이 제작되었다.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인 수성 혹은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인격화한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이다. 조선 중기에 세화(歲華)로 그려지다가 후기에는 화원 시험인 '녹취재'에 출제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수성노인은 산처럼 솟아오른 이마가 클수록 도력이 높아 보인다. 얼굴과 상반신, 하반신의 비율이 비슷한 체구이지만 기품은 당당하다. 긴 머리카락과 수염이 특색이다. 마치 외계인처럼 보인다.


김홍도, 수성노인도 비단에 채색, 130.7×57.6㎝, 177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 '수성노인도' 비단에 채색, 130.7×57.6㎝, 177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사슴과 윤덕희의 사슴


풍속화로 화명이 높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젊은 시절 신선도를 잘 그려서 주목받았다. 그의 신선도상은 조선시대 신선도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단독형으로 그린 수성, 노자, 동방삭 등이 있으며, 여러 명의 신선을 그린 그림으로는 '군선도'가 유명하다. 특히 '신선도 8첩 병풍'은 1779년 35세 때 역관 이민식에게 그려준 것인데, 그 중 '수성노인도'는 수성노인이 사슴과 함께 포즈를 취한 그림이다. 왼손에 쥔 지팡이가 화면 중앙에 높이 솟았다. 특징인 마크가 달려있어 마치 도력을 부리는 깃발 같다. 오른손에는 붉은 빛이 감도는 복숭아가 들려 있다. 보석처럼 빛을 뿜는 복숭아를 보며 신선은 깊은 사색에 잠겼다. 솟아오른 긴 이마에 흰 눈썹과 수염이 영험함을 상징한다. 굵은 선으로 옷자락을 그렸다. 정면을 향한 흰 사슴은 다리를 교차시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흰 뿔이 신선의 수염과 짝을 이루며, 서로가 단짝임을 증명한다.


김홍도의 작품을 감상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림평을 달았다. "노자가 청우를 싫어하여 백록을 불렀는가. 도덕경과 큰 복숭아로 장생의 계책을 삼으니 노자의 도보다 크도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중에게 인기를 얻은 '수성노인도'는 회갑을 축하하고 장수를 축원하는 수복용 그림으로 보편화된다. 인간은 복을 누리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삶을 추구했기에, '수성노인도'는 기복신앙적인 의미를 담아 특이한 작품들로 제작되었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 1685~1766)도 문인사대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수성노인도'를 그려주었다.


윤덕희는 아버지 윤두서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아 다방면의 그림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가 그린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는 여러 신선이 수성노인을 경배하는 장면이다. 사슴을 대동한 수성노인과 장수를 상징하는 동방삭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축수용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유자선과 함께 묘사된 여동빈 또한 길상을 상징하는 팔선 중 하나로 선비 복장에 검을 들고 있다.


여섯 명의 신선이 파도 위를 걸어서 수성노인을 알현하러 오는 중이다. 신선들의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있거나 호리병을 쥐고 있다. 왼쪽 뒤에는 머리 꼭대기에 버드나무가 솟아 있는 유자선이 요괴처럼 서 있다. 원경에는 뾰족한 산들이 실루엣만 드러낸다. 절벽 위에는 소나무가 기괴하게 아래로 뻗어 있다. 그 가운데 술병과 두루마리를 옆에 둔 수성노인이 앉아서 웅크린 백록을 쓰다듬는다. 호위무사 격인 백록은 수성노인의 친구이자 보물이다.


윤덕희, 군선경수도 비단에 수묵, 28.4×19.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덕희, '군선경수도' 비단에 수묵, 28.4×19.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루돌프 사슴과 커피 마시는 수성노인


윤두서의 사슴이 보고 싶어, 미술관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전시실이 텅 비었다. 웬일인가 싶어 알아보니, 전시가 끝나고 다른 전시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전시 일정을 꼼꼼히 챙기지 못한 실수에 허탈해서 미술관 옆 커피숍으로 갔다. 차를 마시며 바깥 경치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커피숍 창에 루돌프 사슴이 산타 할아버지를 태운 썰매를 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록 철 지난 스티커 장식이었지만 사슴과 눈을 맞추며 나도 순간 수성노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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