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장 발언대]정작 가장 힘든 사람은 문을 안 엽니다… “그 문을 두드리는 게 통장의 일입니다”

  • 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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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04 10:26  |  발행일 2026-04-04
구미 진미5통 김월주 통장이 들려준 ‘갓등마을’ 30년 봉사의 기록
원룸·고령화 골목서 복지사각지대 발굴…‘행정 밖 이웃’ 지켜내
김월주 구미시 진미5통장이 마을 경로당 옆에 폐가로 방치된 주택 두 채를 가리키며 오랫동안 집주인을 설득해 주차장을 만들기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박용기 기자>

김월주 구미시 진미5통장이 마을 경로당 옆에 폐가로 방치된 주택 두 채를 가리키며 오랫동안 집주인을 설득해 주차장을 만들기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박용기 기자>

"정작 가장 힘든 사람은 스스로 어렵다고 말을 못 해요. 문도 안 열어줍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먼저 그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지난 2일 구미시 진미동 갓등경로당에서 만난 김월주(65·여) 진미5통장은 "정말 어려운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은 행정이 알기 어렵다. 곁에 사는 주민만이 알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30년 넘게 이어진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진미5통에는 359세대, 416명이 거주하고 있다.


김 통장의 봉사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 시작됐다. 학부모들이 모이면 늘 아이 공부 이야기만 오가는 모습이 싫었던 그는 "앉아서 이야기만 하지 말고, 우리 봉사나 하자"며 엄마들을 이끌고 복지관 밑반찬 봉사에 나섰다.


실천하는 봉사에 진심이었던 김 통장은 미용 기술까지 배웠다. 미용사 자격증을 딴 뒤에는 복지관 직원들과 함께 경로당은 물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노인들을 찾아가 머리를 손질하고, 기다리는 동안 청소와 집안일까지 도왔다. 자격증을 따서 미용실을 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통장을 맡은 뒤 시선은 마을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 김 통장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조선족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가 중이염 치료를 받게 했고, 치아 염증으로 얼굴이 심하게 부은 상황에서는 치과와 연결해 무료 치료까지 이끌어냈다. 또 원룸에 숨어 지내던 젊은 부부와 세 살 아이를 발견해 어린이집과 유치원, 생필품 지원까지 도왔다. 많은 빚으로 인해 주소도 없이 숨어 살던 가족이었다. 어려운 어르신들의 무료 집수리와 홀로 사는 50대 남성의 취업을 연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특히 원룸 거주자들은 인기척이 나도 문을 열지 않고 공동체 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정작 필요한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더 숨어버린다"는 것이 김 통장의 오랜 경험이다.


김월주 구미시 진미5통장이 자신의 텃밭을 보여주고 있다. 김 통장은 밭에서 난 나물을 이웃과 나누고 동네 무료 나눔냉장고에 넣어둔다. <박용기 기자>

김월주 구미시 진미5통장이 자신의 텃밭을 보여주고 있다. 김 통장은 밭에서 난 나물을 이웃과 나누고 동네 무료 나눔냉장고에 넣어둔다. <박용기 기자>

그는 마을 인근 상가 안에서 쓰레기봉투를 지원받으며 홀로 살던 5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되는 일을 겪었다. 당시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가장 먼저 안부 확인에 나섰지만, 지금도 "쓰레기봉투 줄 때 말고 한 번만 더 안부 전화를 했더라면" 하고 자책했다. 김 통장은 한동안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다고 했다. 순간 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이 일 이후 그는 행복기동대 활동과 고독사 예방 교육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사실 올해 그는 통장을 그만두려 했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때로는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미는 사람들 앞에서 회의가 밀려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결국 다시 맡았다. "한 번만 더 해달라"는 부탁도 있었지만, 아직도 문을 두드려야 할 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나한테 부탁했다는 건, 그 사람이 혼자서는 못한다는 뜻이잖아요. 내가 조금만 힘을 보태서 그 사람 고통이 줄어든다면 그걸로 됐죠. 그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김 통장이 두드리는 것은 단순히 닫힌 문이 아니라, '이웃'이라는 이름의 따뜻한 사랑이자 관심이었다. 그는 이날도 밭에서 난 나물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동네 무료 나눔냉장고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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