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봉 경북도 이·통장 협의회장이 본지와 인터뷰 모습.<원형래기자>
"이·통장은 행정의 최일선에서 주민과 가장 가까이 호흡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민들의 목소리를 행정에 전달하고, 행정의 정책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가교 역할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엄태봉 경상북도 이·통장연합회장은 인터뷰 내내 '공동체'와 '소통', 그리고 '지방소멸'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엄 회장은 현재 울진군 울진읍 읍내5리 이장을 맡고 있으며, 울진군이장연합회장을 2년 임기 연임으로 4년간 역임한 뒤 현재 경상북도 이·통장연합회장을 맡아 도내 22개 시·군, 약 8천 명의 이·통장을 대표하고 있다.
그는 "경상북도 이·통장연합회장은 각 시·군 이·통장연합회장을 현직으로 맡고 있는 사람만 출마할 수 있는 자리"라며 "지역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경북 전체 이·통장 조직을 대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경북 22개 시·군의 이·통장들은 주민과 행정을 연결하는 최일선에서 지역 발전과 주민 복지를 위해 묵묵히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통장의 역할은 커졌지만 제도적 지원은 부족"
엄 회장은 현장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행정 지원 부족을 꼽았다.
그는 "도시 지역 통장과 달리 농촌지역 이장들은 대부분 생업과 농사를 함께하고 있다"며 "농번기에도 각종 행정업무와 주민지원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현실은 결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각종 보조사업과 주민지원사업이 늘어나면서 이장들의 역할은 더욱 커졌지만 이를 지원할 조직과 제도는 아직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다른 단체처럼 사무장이나 간사 등 행정 지원 인력이 없어 대부분의 업무를 이장 개인이 감당하고 있다"며 "행정안전부에서 추진 중인 이·통장 관련 법안이 조속히 제정돼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통장들의 법적 지위 확보는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2023년 행정안전부가 이·통장 기본수당을 인상하며 법적 근거 마련을 약속했으나,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관련 개정안들은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22대 국회 들어서도 법안 발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지방자치법이 아닌 시행령에만 근거를 두고 있어 체계적인 행정 지원과 사무 인력 충원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지난 3월 엄태봉 이·통장 협의회장이 경북도청 동락관에서 정기 대의원 총회를 하는 모습.<원형래기자>
"도 연합회에도 사무실이 없는 현실"
엄 회장은 3년간 도 연합회를 운영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으로 독립적인 사무공간이 없다는 현실을 꼽았다.
"22개 시·군 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지역 현안을 논의할 공간조차 없습니다. 행정의 중요한 협력조직인 만큼 최소한의 행정 기반은 마련돼야 합니다."
그는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도 연합회와 시·군 연합회의 운영도 훨씬 안정되고 체계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타 광역지자체들은 조례 제정을 통해 이·통장 연합회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충청남도와 부산광역시 등은 일찌감치 '이·통장연합회 지원 조례'를 제정해 도정 홍보사업, 역량강화 교육, 우수사례 공유 등에 필요한 예산을 명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경북 역시 도 단위 연합회의 안정적인 운영과 독립적인 사무공간 확보를 위해 상위법 제정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조례 제정 등 제도적 뒷받침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직도 마을회관 없는 마을이 있습니다"
엄 회장은 경북 곳곳을 다니며 가장 안타까웠던 사례로 마을회관이 없는 마을을 소개했다.
그는 "주민들이 함께 모일 공간조차 없는 마을이 아직도 적지 않다"며 "회관을 지으려 해도 부지 확보가 어려워 사업이 중단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군유지나 공유지를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행정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준다면 주민 복지와 공동체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엄 회장은 지방소멸과 초고령화를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진단했다.
"상주와 김천, 영천, 성주, 고령 등 농업지역은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행정에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 마을에서는 일손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는 "이제는 한 마을만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라며 "여러 마을이 함께 협력하고, 이장들도 공동체 중심으로 역할을 확대할 수 있도록 행정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엄 회장이 지적한 '마을회관 미설치' 문제는 지방소멸 위기 속 마을 공동체 유지와 직결된다.
부지 매입 비용 부담으로 사업이 좌초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전문가들은 지자체가 보유한 유휴 군유지나 폐교 부지 등 공유재산을 마을회관 건립에 무상 임대하거나 적극 매각하는 방식의 유연한 행정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청년이 돌아오는 경북을 만들어야 합니다"
엄 회장은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청년 일자리 창출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도시로 떠나고 있습니다. 지역의 특성에 맞는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주의 참외산업을 예로 든 그는 "청년들이 기존 농업인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지원정책이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울진의 미래에 대해서는 "원자력발전소와 원자력수소 국가산업단지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성장동력"이라며 "교육과 취업이 연계된다면 전국은 물론 해외의 젊은 인재들도 울진을 찾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학교가 살아야 지역도 살아납니다"
엄 회장은 교육 문제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학생 수 감소로 앞으로 5~10년 안에 읍·면 단위 학교가 사라지는 곳이 더 많아질 것"이라며 "국제학교와 같은 경쟁력 있는 교육시설을 유치해 젊은 세대가 찾아오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고령화 시대인 만큼 어르신들이 편안한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하면서도 건강한 어르신들은 마을 공동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주민을 위한 봉사가 이·통장의 사명입니다"
엄 회장은 끝으로 "누가 연합회장을 맡더라도 이·통장 조직이 더욱 체계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며 "앞으로도 주민과 행정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더 살기 좋은 경상북도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엄태봉 회장의 인터뷰는 단순히 이·통장 조직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공동체'와 '청년', 그리고 '행정 지원'이었다.
지방소멸과 초고령화가 가속화되는 현실 속에서 그는 마을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는 결국 주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봉사하는 이·통장이라고 강조했다.
법과 제도가 뒷받침되고, 청년이 돌아오며, 학교와 공동체가 살아날 때 비로소 지방의 미래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메시지였다.
주민과 행정을 잇는 작은 다리가 모여 지역을 살리고, 그 지역이 모여 경북의 미래를 만든다는 그의 말은 오늘날 지방행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원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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