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고대 말갖춤으로 보는 대구의 마사문화

  • 김혁중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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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9-16 16:38  |  수정 2026-09-16 16:51  |  발행일 2026-09-17
김혁중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

김혁중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

출근길, 신호 대기 중인 옆 차선 스포츠카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자동차는 이제 사람과 짐을 옮기는 도구를 넘어선 지 오래다. 어떤 차를 모는지가 그 사람의 경제력과 취향을 말해주고, 결혼식장이나 회사 앞에 서 있는 차종이 은근한 신호로 읽힌다. 최근에는 자율주행이라는 화두까지 더해졌다. 운전대를 놓아도 되는 시대, 자동차는 이동수단이자 신분의 상징이라는 두 얼굴에 '기술의 첨단'이라는 세 번째 얼굴을 더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익숙한 풍경은 사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반복이다. 고대에는 말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말은 누구나 가질 수 없었다. 말을 기르고 훈련시키며 화려한 말갖춤까지 마련하려면 상당한 부와 조직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재갈, 등자, 안장,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말띠드리개와 말띠꾸미개는 단순한 말갖춤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분과 권력을 보여주는 위세품이었다. 오늘의 자동차처럼, 고대의 말갖춤도 실용성과 과시라는 두 겹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대구는 이 이야기의 흥미로운 무대다. 삼한을 이루던 진한의 소국 다벌국이 자리했던 대구는 수레와 말 문화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곳 가운데 하나였다. 평리동에서 확인된 청동제 수레 갖춤과 철제 재갈은 이 지역이 일찍부터 수레와 승마 문화를 함께 누렸음을 보여준다. 흉노 계통의 재갈을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로 직접 만들어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대구 말갖춤 문화의 정점은 5세기 달성고분군에서 확인된다. 특히 55호분에서는 안장 두 세트와 함께 경주 황남대총 남분 단계에 정형화된 신라 양식의 화려한 말갖춤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라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만은 아니다. 재갈 형태와 장식을 위한 후걸이 구성, 말띠드리개의 형태와 도금 기법에서는 인접한 여러 지역과 교류한 뚜렷한 지역성도 확인된다.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대구는 낙동강을 사이에 둔 주변의 창녕·고령·합천과 긴밀한 관계망을 유지하며 말갖춤 제작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즉 대구의 말갖춤은 중앙의 문물을 그대로 받아쓴 결과물이 아니었다. 여러 계통의 기술과 미감을 골라 받아들이고, 다시 대구의 방식으로 조합한 산물이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선택한 색과 사양, 취향에 따라 전혀 다른 차가 되는 것과 닮았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이동수단에 자신의 지위와 취향,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드러냈다.


1천500년 전 달성고분군에 묻힌 이의 화려한 안장과 말띠드리개는 그가 어떤 말을 어떻게 부렸는지를 넘어, 그가 속한 공동체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었는지를 말해준다. 오늘 우리가 모는 자동차 역시 언젠가는 그런 눈으로 읽힐 것이다. 이동수단은 언제나 그 시대의 관계와 욕망을 싣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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