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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에 화재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화재를 어떻게 막았을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화재사고는 약 550건. 이 시대에도 화재를 막기 위한 노력을 지금 못지않게 활발했다.
태종 6년에 조선시대의 불을 새로 마련한다는 뜻으로 개화(改火)령을 내리기도 했다. 나무를 마찰해 새 불을 내어 묵은 불과 바꾸는 의식으로, 매년 5차례나 열었다.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여름에는 살구나무와 대추나무, 가을과 겨울에는 작유와 괴단에서 불씨를 얻었다. 개화의 제도를 따르지 않으면 음양의 부조화로 화재가 일어난다고 믿기도 했다.
화재는 천재지변은 아니지만 하늘의 경계이며, 임금의 부덕의 소치로 여겨졌다. 화재 원인으로는 부주의와 방화가 가장 많으며, 특히 술에 취해 화기취급 부주의로 인한 것도 많았다. 태조 7년에 궁의 감독관에게 술을 내려줬더니 일꾼이 불을 냈고, 술에 취해 나오지 못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큰 불이 난 후에는 금주령을 내려 백성들의 평소 행동에 주의하도록 했다.
현재의 방재대책인 방화벽은 태종 15년에 이미 만들어졌다. 또 집이 붙어있어서 옆 건물로 번지기 쉬우므로 중간의 집을 헐도록 하고, 물을 비축하게 했다.
세종 5년에는 "경외(京外) 각처의 창고가 여러 번 화재로 인해 연소되는 폐단이 있으니, 그 창고를 5~6 기둥의 간격을 두고 담을 싸서 불기운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옥상에도 두껍게 바르고 기와로 덮고, 처마 밑에 돌아가면서 담을 쌓아 그 높이가 처마까지 닿도록 해 화재를 방지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것은 현재의 방화구획에 해당하는 것으로 화재가 발생해도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지붕재료인 기와도 방화재료였다.
성종20년 2월24일 강원도 양양에 산불이 나서 주택 200호와 낙산사 관음전이 소실됐다고 적혀있다. 이것은 2005년 4월의 양양산불로 인한 낙산사, 홍예문 등의 화재와 동일한 사례이다. 이 대목에서 이탈리아 현대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가 남긴 말이 생각났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 화재의 역사 또한 인간의 역사가 비슷하지 않은가.
이지희(경북대 건설토목공학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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