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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늦은 봄날, 묘령의 아가씨한테서 한 통의 전화가 출판사로 걸려왔다. "친구가 시집을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우선 원고를 한번 검토해보자고 했다. 얼마 뒤 사무실로 벽안(碧眼)의 거구인 한 사내가 찾아왔다. 스물 일곱살의 미국인 제이슨 로저스씨. 줄무늬 남방에 헐렁한 멜빵 바지를 입고 짧게 깎은 머리에 안경을 쓴, 흡사 달마상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오쩌둥 초상이 그려진 누런 천가방을 열고 다소 수줍은 듯 원고를 내어놓았다. 나는 여러 편의 시를 읽어 보면서 번역시냐고 물어보았다. 직접 한글로 쓴 시라고 말했다. 일순 호기심이 발동했다. 미국 청년이 쓴 시는 충분히 신기하고 새로웠다. 그의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한글로 시를 쓴다는 사실에 나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예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해 가을, 나는 그에게 "제이슨, 이제부터 내 시 제자해"라고 하자, 그도 흔쾌하게 "그러하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 뒤부터 우리의 만남은 더욱 잦아졌다. 나는 끊임없이 한글로, 그는 영어로 말한다. 눈짓, 손짓, 심지어 한글로 필담(筆談)을 나누다 어색하면 웃음으로 때운다. 그래도 소통 부재에 걸리면 그 간극을 여자친구가 대신 메워준다.
제이슨씨는 이제 한국생활이 올해로 8년째로,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영어회화를 강의하는 한편,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이수 중이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한국의 시와 소설을 읽었다. 그는 평이한 것을 싫어한다. 이상을 좋아한다. 한국 시인들도 어렵다고 고개를 흔드는 이상을 좋아하다니 그의 시적 경향은 특이하다. 그는 한글로만 시를 쓴다. 영어로 소설을 쓴 적은 있지만 시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방학 때는 하루에 15시간씩 시공부를 한다고 했다. 정말 그의 한국문학에 대한 열정이 부럽기만 하다.
나는 그의 시 400여편 가운데 73편을 가려뽑아 시집 '테이블 전쟁'을 펴냈다. 그는 미국인으론 처음으로 한국 시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단순히 한글로 시를 쓰는 신기한 미국인이 아니라 시의 폭과 넓이, 깊이를 더해 한국문학의 몽리 면적을 넓히는 진정한 작가가 되기를 빈다.
욕심을 더 보탠다면 대구문학이, 한국문학이 제이슨씨를 통해 세계의 문학으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박진형(시인·만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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