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내 마음의 비상구

  • 입력 2011-05-09  |  수정 2011-05-09 08:00  |  발행일 2011-05-09 제24면

화재나 지진 따위의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날 때에 급히 대피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마련한 출입구를 ‘비상구’라고 국어사전엔 밝히고 있죠.

그대, 혹여 마음에 화재가 난 적 있나요? 컴컴한 그믐밤에 마른 나뭇가지 툭 떨어지며 일으킨 바람이 은밀히 숨어있는 불씨를 찾아내어 접시불을 일으키고 급기야 온 산을 불바다로 만들듯이, 우연찮은 일로 또는 헉헉대는 일상의 건조함으로 마음 온통 그을리진 않았나요?

그대 마음의 삭정이에 불길 번지면 어떻게 대피하나요?

그렁그렁 마음이 보채는 날이면 아파트 뒷문으로 난 차도를 지나, 포도밭을 지나 연못으로 갑니다. 덩치가 너무 커서 황망하지도 않고요. 너무 작아서 답답하지도 않은 안성맞춤의 ‘기연지’랍니다. 못의 이름을 알지 못해서 고민하던 차에 선배 시인의 권유로 정한 호칭이에요.

아슴아슴 들판의 젖무덤같은 고산(孤山)이 저만치 단아하게 누워 있고, 그 아래 경부선 철로가 허리띠처럼 놓여 있는데요. 상행선 무궁화호가 다홍빛 애벌레로 지나가기도 하고요. 하행선 푸른 새마을호가 느닷없이 헛기침을 하면, 한 무리 논병아리들이 종횡무진 하는 곳이에요.

예를 갖추어 말하지 않아도 내 맘을 알고 오냐오냐 토닥여줘요. 졸음이 일도록 장황한 설교를 하지도 않고, 빈대소갈딱지라 책망치도 않아요. 겨울엔 갈대의 머릿결로 가끔은 흰눈으로 맞아주고요. 가을엔 먼발치의 하늘, 구름 당겨서 띄워두기도 하고요. 작년 여름엔 깜짝 무대를 펼쳐주기도 했어요. 왕래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연(蓮)을 올렸지요. 산딸기 덤불 아래 호박엉덩이 만하던 자리가 꽃대를 올리면서 차츰차츰 번지더니 제법 근사한 연무대가 되어, 흉곽에 걸린 묵은 불길조차 일순 잠재우곤 했어요.

봄은 또 봄대로 풀꽃 피고지고, 고요가 키우는 뻐꾹새 소리, 풀벌레의 화답은 마음이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일러준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제 그 나이란 걸까요?

그대, 그런 날 가끔 오셔도 좋습니다.


김기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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