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렇다. 우리는 너무 많은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에 맞추어 귀가하지 않은 가족을 기다리기도 하고, 미래를 밝혀 줄 무지갯빛 희망을 기다리기도 하며, 쓸쓸히 떠난 사랑을 기다리는가 하면, 다가올 계절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뿐인가. 현대인에 군림하는 휴대전화의 부름에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최근에 나는 즐겨 산을 찾는다. 산이라기보단 산책에 가깝다. 아파트를 벗어나 야트막한 오솔길로 들면 자잘한 풀꽃이 제 키를 돋우어 인사를 한다. 모른 체 할 수 없다. 무릎을 접고 앉아 시선을 낮춘다. 고 작은 생명이 주는 향기의 말씀은 한 치 앞 세상의 것 잠시 내려둬야만 들을 수가 있다. 오롯이 그 속에 깃들어 흰제비꽃이거나 양지꽃이 되어 보는 일이다.
가끔 그 내밀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무지막지 건너오는 휴대전화 신호다. 망설이다가 받는 통화 끝엔 후회를 하기 일쑤다. 돌아보면 비단 나뿐만은 아니다. 걸어가면서 혹은 멈추어 서서 두고 온 세상의 일이나, 잠시 미루어도 무방할 수다로 주변인들의 마음까지 헝클어놓는다.
얼마 전이다. 나의 기다림에 보류신청을 하였다. 산책길에 볼펜과 메모지는 물론 애물단지 휴대전화를 집에 버려두기로 했다. 기다림의 금단현상은 쉬이 가셔지지가 않았다. 문자가 오진 않았을까. 급한 전화라도 왔음 어쩌나. 괜한 근심은 치렁치렁 칡넝쿨처럼 뻗어 걸음에 조바심이 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애써 콧노래를 흥얼거려 생각을 다독였다. 최근 지인들에게 적잖은 원성을 듣긴 듣는다. “요새 만다꼬 그클 저나를 안 받는데요?” 굳이 답을 하자면 이렇다. ‘산이 저나 받는 거 봤심니까?’
그만한 일로 그럴싸한 자연주의자가 된 건 아니다. 그러나 기계의 군림에서 한 발 빠져나와 불특정 기다림의 시간으로부터 종종 자유로워진 건 분명하다.
일찍이 쇼펜하우어는 “평범한 사람은 시간을 소비하는 데 마음을 쓰고, 재능 있는 사람은 시간을 이용하는 데 마음을 쓴다”라고 하질 않던가. 비전을 향한 기다림이 아니라면, 그를 위하여 또는 나를 위하여 기다림의 일부 접어도 좋겠다.
김기연<시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