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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약국은 주로 안과 질환 환자분이 많다. 인체에서 노화진행을 빠르게 느끼는 신체부위 중 하나가 눈이다 보니 백내장, 녹내장 등 질환의 어르신이 많이 오신다. 약국 손님의 약 55%가 60세 이상이고, 그 중 약 60%가 할머니 손님이다. 그렇다보니 요즘 일상생활에서 ‘할머니’라는 단어가 너무 머릿속에 넓게 자리잡고 있다.
약국에 오는 할머니 중에는 자기 집 마당에서 키운 빨간 토마토를 하나 가져다주는 분도 있고, 길거리에서 파는 하얀 설탕이 발린 도넛을 봉지에서 한 개 꺼내주는 분도 있다. 어떤 할머니는 작은 검은색 지갑에서 두 번 접힌 천 원짜리 두어 개를 꺼내어 파스를 사고는 “많이 파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럴 때면 난 가슴이 짠해지면서 많은 고마움을 느낀다.
가끔씩 쉬어가는 할머니 중에는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할머니도 계신다. 그동안 할아버지한테 매도 맞고 욕도 먹고 마음대로 외출도 못하고 지금이라도 이혼해 달라하면 안 해줘서 힘들어 하는 분이 많다. 요즘 젊은 새댁이나 아주머니 세대만 되어도 이혼하고 말았을 것인데, 할머니가 그 긴 세월을 참고 또 참고 살아온 건 아마 한국인의 핏속에 흐르는 ‘한(恨)’이라는 게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한의 한 갈래 중에는 남존여비 사상을 바탕으로 한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한이 있는데 남성들의 횡포, 시집살이의 고달픔,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 등이 전통사회에서 많은 여성이 겪었던 애환이다.
약국을 개업하기 전에는 할머니라는 존재를 잘 못 느끼고 살았다. 요즘 많은 할머니를 대하다 보니 새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노인들의 4대 고통인 ‘빈고·병고·고독고·무위고’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할머니도 언젠가 누구의 딸, 손녀, 여동생, 누나, 언니, 아내, 며느리, 어머니였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사소한 말 한 마디라도 나누어 보자.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어머니는 할머니인 것 같다.
김영상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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