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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난실로 향했다. 난실 문을 열자 기분 좋은 청향이 코끝을 스치며 지나갔다. 반가운 마음에 난실 여기저기를 기웃거려 보았다. 키 큰 혜란 사이에 숨어있던 관음소심이 어느새 꽃대 두 대를 뻗어 은은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평소 값이 싸다는 이유로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수천 년 전부터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난은 이미 2500년 전 공자가 은곡의 잡풀 속에서 풍겨오는 난향을 맡고 “깊은 산속 난초는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그 향을 피우는구나”라며 그 귀품을 ‘의란조’란 노래에 실어 찬양하였고, 고려시대 때 이규보도 “방으로 드니 난향이 풍기는구나. 붓 잡고 시 한 수 휘두르니 수 없는 술잔이 권해져 듬뿍 취했네”라는 시를 지어 그 향의 그윽함을 표현했다.
향을 가진 중국의 난이 우리나라로 처음 건너온 것은 고려 때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때는 중국으로부터 난을 가져오는 일도, 꽃 피우는 일도 무척 힘들었다. 조선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난향은 둘째 치고, 국왕이었던 영조마저도 난을 본 적이 없어 상상으로 난화를 그렸을 정도였다.
이처럼 귀했던 중국의 향란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로 건너오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이후부터다. 그러나 초기에는 유입된 양이 워낙 적고 고가였던 까닭에 극소수 고관대작과 부유층의 차지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이렇게 들어온 난들이 증식되면서부터 점차 일반인도 난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난향에 이끌려 ‘애란(愛蘭)생활’을 시작한 지도 20여년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종류의 난을 접해보았지만 역시 난은 향이 있어야 제격이다. 현재 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키우는 우리 자생란에는 아쉽게도 향이 없다.
난향 가득한 난실을 나서며 옛 초나라의 시인 ‘굴원’이 이소경(離騷經)에서 말한 “항상 난에 의탁하고 난꽃을 옷깃에 매달아 그 고고한 향을 거울삼았다”는 구절을 떠올렸다. 예전 뱃사람들이 천리 밖에서 날아온 난향을 맡고 육지가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렸다는 난향천리(蘭香千里)란 말처럼 난의 향기를 닮은 사람이 우리 주위에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무건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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