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박희채<소설가·안동역장> |
단원 김홍도는 조선시대 화가로서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관료로서의 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조선 영조 때(1745년) 중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약관의 나이도 채 되지 않아 도화서의 화원이 된다. 그 후 서른일곱 살에는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기(지금의 안동지역) 찰방 벼슬을 제수받았다.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장하던 관직이었다. 당시 한낱 중인이었던 그가 당시에는 전례가 없던 관료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의 인품과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대부분 일하는 백성들이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드는 장인, 밭을 가는 농부,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모습 등 그는 주로 서민들의 정서와 애환이 묻어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만큼 그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는 당시의 유행을 선도하는 파격적인 예술가적 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엄격한 유교적 윤리의식이 지배를 하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풍속화에는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짧은 저고리를 입고 있는 여인이 많이 보이는데, 이런 노출이 심한 옷은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모아 당시의 일상적인 옷차림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듯 친서민적이고 반권위적이던 그의 행보는 그의 목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굶주린 백성을 위해 거리낌 없이 관아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고, 늦은 나이에도 짝을 찾지 못한 백성을 위해 중매를 서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청빈한 관료였다. 늘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고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늘 남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는 법. 중인인 그가 이렇듯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보이자 위유사 홍대협은 ‘김홍도는 비천하고 미미한 환쟁이 출신으로 고을의 수장되어서도 중매나 행하고 사냥이나 즐겨하며…’ 하는 식의 상소를 올려 기어이 그를 파직되도록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인정을 받기보다는 남의 약점을 헐뜯고 흑색선전을 하여 남을 밟고 올라서려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