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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 지중해의 어느 섬나라로 휴가를 다녀온 친구가 작은 선물 상자를 건넸다. 그 안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의, 구를 깎아놓은 듯 바닥이 둥근 유리잔 한 쌍이 들어 있었다. 험한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 일생을 보내는 뱃사람이 쓰는 잔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그 잔의 형태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파도의 흔들림에 따라가도록, 장인의 투박한 손끝에서 만들어진 매끈한 유리잔이었다.
뱃사람들의 잔은 환경과 쓰임에 잘 맞게 진화되었다. 진화란 한 마디로 변화를 의미한다. 끊임없는 변화를 거친 후, 제자리에 잘 적응되어 반구체(hemisphere)의 형태를 지니게 된 유리잔처럼 사람도 일생동안 숱한 진화의 과정을 지난다.
칠레의 소설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인간의 얼굴은 설사 그것이 사진 속에 나와 있더라도 본래의 속성을 절대 속이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얼굴은 그 인간이 거주했던 모든 영역을 담고 있는 세밀한 지형도가 아니었던가”라고 했다. ‘거주했던 모든 영역’은 단지 지리적인 요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얼굴에서 나타나는 ‘지형도’는 미추(美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얼굴은 그가 사는 세상과 그의 삶의 자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지형도’는 매 순간 변화한다. 자신의 얼굴을 책임지는 것은 스스로 ‘지형’을 개간하고, 개척하는 일이다. 그래서 ‘비옥한 토양’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옥한 토양이란 흙 자체가 살아 있는 것을 말한다. 비옥한 땅을 가꾸는 일은 먼저 돌을 치워내고, 잡초를 제거하고, 거름이나 영양분을 자주 뿌려주어야 한다. 즉, 좋지 않은 습관과 그릇된 사고방식을 버리고, 마음의 양식을 구하여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아닐까.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지금,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으며, 다가올 새해에는 어떤 얼굴로 세상 앞에 설 것인지 차분히 생각해 볼 일이다.
정유지<섬유조형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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