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명분있게 소신껏

  • 입력 2012-02-03  |  수정 2012-02-03 07:37  |  발행일 2012-02-03 제18면

칼바람이 부는 겨울철엔 군고구마와 호빵같은, 보기만 해도 따뜻한 음식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없지만, 해가 지고 모두가 귀가할 저녁시간이 되면 동네 골목 어귀에서 풍겨나는 군고구마 냄새가 행인의 발길을 붙잡았다. 특히 젊은이들이 “대학생인데, 다음 학기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고구마를 꼭 팔아야 되는 넋두리까지 섞어가면서 넉살좋게 장사를 하곤 했다. 지저분한 외모에 마지 못해 나온 듯한 늙수그레한 아저씨보다 모범생같은 외모에 귀여운 빵모자, 흰 면장갑, 팔목토시까지 한 청년 앞에 손님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청년은 명분도 분명하게 겨울 한 철 장사인 군고구마 장사꾼다운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몇 년 전 우리 동네의 한 네거리에 포장마차가 생겼다. 주메뉴는 즉석에서 튀겨내는 동그란 찹쌀도넛이다. 이 포장마차에서는 계절식품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찰옥수수를 쪄서 팔고,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붕어빵을 팔기도 한다.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은 일요일엔 어김없이 쉬고, 정오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한다. 흰 가운에 하얀 주방장 모자를 쓰고 일한다. 더운 여름이라고 해서 긴팔 가운을 벗거나, 겨울철에 춥다고 해서 가운 위에 두꺼운 점퍼를 입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근무시간에는 항상 그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옥수수를 즐기는 나로서는 여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그 차림새가 신기해서 사러갔고, 다음엔 음식이 맛있어서, 다음엔 투철한 직업의식에 감탄해서 즐겨 찾는다. 처음엔 ‘아저씨’라고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사장님’이라 부르게 됐다. 사장이자 종업원인 그는 누가 손님으로 오든지 “뭘 드릴까요? ~~네, 손님”이라고 친절하게 대한다. 어느 여름날 도넛을 튀겨내고 옥수수를 쪄내는 사장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함께 간 아들이 “사장님, 더운데 모자 벗으면 안되나요?” 했더니, 사장님은 웃으면서 “모자를 벗으면 셰프같지 않잖아”는 것이다. 우리는 둘 다 멋있는 셰프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경기 침체로 서민들은 더욱 살기 어렵고, 폐업신고도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뉴스를 접한 오늘은 왠지 명분과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군고구마 청년과 포장마차 셰프가 많이 생각난다.

서정임 <대구차문화원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