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질투에 대한 가벼운 은유

  • 입력 2012-11-13  |  수정 2012-11-13 07:36  |  발행일 2012-11-13 제22면
[문화산책] 질투에 대한 가벼운 은유

마음에겐 자신만의 이유가 있다. 지극히 본능적이고 충동적이어서 거의 무의식에 가깝고, 완전히 독자적이고 개별적이어서 아주 고집스러우며, 따라서 이성이나 상식 등 따위로는 풀이할 수 없기에 사방 불통의 때를 자초하곤 하는 이유들 말이다. 때로는 그 이유들이 마음을 추동하여 사람을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밀어뜨리기도 한다. 그의 가장 훌륭한 예가 질투다.

프랑스 철학자 리트레는 자신이 편찬한 사전에서 질투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는 감정”이라고. ‘감정’이라고. 물론 이성은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한다. 사랑의 굳건함과 신실함을 믿으라고 타이른다.

하지만 감정이 이성의 말을 듣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물론 감정도 영향을 받기는 한다. 그렇지만 감정은 결코 부탁이나 명령을 받지는 않아서 어떤 감정 하나만 집중해서 키우기도 하거니와 강력해진 그 감정으로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차단해 버리고, 대립하는 사실의 접근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오로지 길러낸 그 감정 하나만 남겨둔다.

급기야 온몸이 눈 하나만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그저 천 개 만 개 불어난 눈으로 상대방을 샅샅이 훑고 집요하게 쫓기만 한다. 당연하게도 질투를 떨어내고 싶어지는 때가 오지만, 질투란 감정은 드러내놓고 해결하기엔 너무나도 ‘쪽팔리는’ 문제다.

롤랑 바르트도 이렇게 거들었다. “당신이 질투한다면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로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당신의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즉 당신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오호통재라. 그러나 질투는 고통과 수치심보다도 비생산적이라는 점에서 더 멈출 줄 알아야 한다. 한 몸을 모두 눈으로 바꿔 가동시키려면 다른 기능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질투라는 집착의 눈을 줄여야 한다. 버려서 원래대로 돌려놔야 한다. 그러지 못하겠는가. 하면 어쩌랴. 그냥 감아버릴 수밖에.

김진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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