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세월이 가면

  • 입력 2012-11-22  |  수정 2012-11-22 07:30  |  발행일 2012-11-22 제19면

거울 앞에 서면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새파랗던 내 모습은 간데 없고, 친정엄마가 거기에 웬일로 계시는가. 나이를 먹는 일이야 자연스러운 것이니 겁낼 일은 아니지만, 쏜살같은 세월의 빠름에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면 잃는 것도 많지만, 얻는 것도 적지 않다. 젊은 시절의 격정과는 달리 세상사에 느긋해지는 마음의 여유, 어지간한 충격에도 놀란 표정없이 버틸 수 있는 대범함도 생긴다.

젊은 시절 다소 다혈질이던 필자는 조금만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를 들으면 바르르하면서 공격적으로 변하곤 했다. 그러던 내가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게 되고, 화가 나도 긴숨 한번 쉬고 참을 수 있게 되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게 됐다. 오랜 연구 끝에 좋은 색깔을 빚어내면서 자신을 칭찬할 줄 알게 되고, 미운 것의 앞뒤를 볼 수 있게 되며, 살아있는 생명을 점점 귀하게 여기게 됐다.

마침내 매사에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는 게 삶의 좌우명으로 자리잡았다. 항상 내게 아쉬웠던 이해와 사랑과 포용이 세월에 힘입어 조금씩 자랐다.

노예제 폐지운동에 앞장섰던 19세기 미국의 사회 개혁가 웬델 필립스는 “사람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좋은 포도주처럼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의 공방이 있는 영천은 포도가 많이 나는 고장이어서 초가을이면 온 마을에 포도향기가 진동한다. 이때 달콤한 맛과 향이 나는 포도로 갓 빚은 포도주는 숙성이 안돼 떫은 맛이 난다. 그러나 오래 익히면 숙성된 맛과 향으로 애호가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명품으로 변한다. 시간의 힘이요, 세월의 힘이 아닌가. 사람도 포도주가 익어가는 것처럼 세월에 따라 맛과 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

학창시절 무척이나 좋아했던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란 시가 생각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중략)//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가을에 낙엽이 구르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어대던 그 소녀는 어느덧 가슴에 담은 사랑을 빙긋이 추억하는 중년여인으로 바뀌었다.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의 힘이다.

문영숙 <햇님달님 천연염색공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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