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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이 세상은 ‘있으라’ 전과 후로 나뉜다. ‘이르시되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가 기준인 것이다. ‘있으라’ 이전은 ‘없음’의 때였다. 혼돈과 공허, 흑암 위에서 단지 ‘없음’만이 유일했다. 그러다 불현듯 신이 나타나 ‘있으라’고 하면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없음’은 여전히 있으면서 새로운 동료가 생겨난다. 빛·어둠·땅·별·나무·생물,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말이다. 바야흐로 만물이 주인공인 때로의 진입이었다. 그러자 신이 말한다. 보기에 좋다고.
‘있으라’에서 ‘그대로 되니라’까지가 전부였다면 우린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저 ‘있음’만으로 인정받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마무리를 담당하면서 고통이 발생한다. 세상이 ‘있음’, 즉 ‘존재’ 그 자체에서 ‘봄’, 즉 ‘평가’의 대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보기에 좋거나 덜 좋거나, 보기에 나쁘거나 더 나쁘거나.
이후 태어남과 죽음이 반복되면서 취향과 기호라는 유전자가 대물림된다. 사람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지도록 말이다. 물론 거기까지도 괜찮다. 더 좋거나 더 싫을 수 있다. 자연스럽다. 그래야 극복하고 발전한다. 그러나 그 감정이 차별이라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상황은 비극으로 길을 튼다. 곤란하고 안타깝고 분노하고, 그러다가 결국엔 완벽하게 불행해져 버리는 비극.
고통도 밑천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것은 진실이어서, 얼마간의 고통은 독감 백신처럼 사람의 면역력을 키운다. 건강에 대한 일종의 보장인 셈이다. 문제는 적정량을 초과했을 때다. 과한 백신은 사람을 실제로 환자로 만든다. 그리고 그 양이 과한지 아닌지는 각자의 신체가 증명한다.
고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느냐는 말은 무지하고 게으른 변명이다. 설사 힘을 골고루 나누어 손가락을 깨무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손가락들이 다 다르다는 데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손가락을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어떤 손가락은 말짱하지만, 어떤 손가락은 멍이 들고, 어떤 손가락에선 피가 난다. 그러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선이겠다. 한참 기울어진 마음일지라도 평형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연기. 어쩌겠는가. 그렇게라도 해야지. 손가락 하나를 잘라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김진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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