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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께가 근질근질했다고 치자. 누군가는 알레르기를 의심하면서 이불을 걷어 볕에 널 것이며, 어떤 누군가는 역류성 식도염을 염려하면서 끼니의 내용과 규칙성을 되짚어볼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난치병을 근심하면서 종합검진을 계획할 것이다. 말고도 기타 등등 다양한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웬걸,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양심에 털이 난 걸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북슬북슬 수북하게 뒤덮여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다. (양심이 없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려는가? 단언컨대 그건 사람이 아니다.) ‘인간은 양심을 갖고 있으며, 양심이라는 내면의 판사에게 감시당하고 위협받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품도록 요구받는다’라는 칸트의 말처럼 위인들의 살짝 꼬인 명언을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양심이란 필수불가결하다.
왜 그러할까. 그것은 양심이 인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아주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예의 말이다. 물론 일부 동물에게서도 양심에 의거한 행동을 관찰할 수 있으니, 도덕과 윤리로 충만한 존재는 오로지 사람뿐이라고 으스댈 것은 없겠다. 하지만 양심으로 인해 고통받고 자학하고 반성하며, 심지어 철학적 사유까지 하는 존재는 아직까지 사람만이 유일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무 자주 무례하고, 너무 심하게 몰상식하다. 양심에 털이 얼마나 났는지 감각이 무뎌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털도 그만의 장점이 있다. 아주 적은 양의 비누로 아주 많은 양의 거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혹이 아니고 털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것은 수술 같은 공격적인 방법이 아니어도 회복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뜻 아닌가. 그러니 어느새 털이 덥수룩해졌다면, 밀어버리거나 뽑아낼 방법이 없다면 열심히 빨기라도 하면 된다. 박박 문지르고 꼭꼭 짜서 뽀송하게 말리면 어느 정도는 감각이 되살아날 것이 분명하므로.
오늘 동네 산에서 누군가의 양심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집어던져진 2인용 소파는 한참 후에나 부패가 시작되겠지만, 지문처럼 남겨진 양심에선 벌써 썩는 냄새가 지독했다. 저기 혹시, 그 양심, 당신 건가? 부디 가져가 빨기를 바란다. 기왕이면 손세탁이 낫겠다. 그런 양심을 집어넣고 작동시켰다가는 세탁기도 버거워서 바로 고장날 터이니.
김진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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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양심에 대한 가벼운 은유](https://www.yeongnam.com/mnt/file/201212/20121211.010220731520001i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