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나와 함께 춤추실까요?

  • 입력 2013-03-11  |  수정 2013-03-11 07:32  |  발행일 2013-03-11 제23면

“새해를 맞아 올해 계획은?”하고 친구가 물어왔다. 나는 “춤추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춤! 그냥 춤이요? 아니면 은유적인 표현인가?” 묘한 미소를 띠며 그가 다시 물었다. 나의 답은 “둘 다”였다. 나는 춤추고 싶다. 지난 해부터 나는 특별히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춤추리라 생각했다. 나는 몸치에 가깝다. 춤을 춰본 적도 별로 없는 나에게 춤은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던 차에 최근, 여성주의 상담가들의 의식향상집단에서 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만난 춤의 정의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존재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것’이었다.

예부터 큰 수행자들은 생명과 우주의 기운을 호흡하며 춤을 추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용담검무(龍潭瞼舞)’를 추었고, 원효대사는 ‘무애무(無碍舞)’를 추었다. 생사고락의 온갖 세속 번뇌를 한 개 별빛에 모으는 법열의 ‘승무(僧舞)’도 수행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는 “춤추라, 춤 출 수 없으면 혁명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춤춘다는 것은 내 안의 삶의 충일의 욕구가 현현하는 순간이다. 사회적 조건에 내면화되고 길들여져 로봇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의 빛과 끌림을 따라 생명의 에너지가 창조해내는 몸짓이자 존재의 자기향유인 것이다.

그렇게 되짚어보면 무기력했던 어린 시절, 약자로서, 여성으로서, 지식과 부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로서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차별과 폭력에 저항해왔던 시간들이 나에게는 바로 춤추는 행위였구나 싶다.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스크럼을 짜고, 돌을 던지다 한꺼번에 터지는 지랄탄과 경찰의 폭력이 무서워 도망치듯 연극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예술이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저항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반핵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가부장제 폐지와 반성매매 운동을 하고, 피해자·약자들과 연대하며 서로 도우는 과정에서 나는 여성주의자가 되었고 치료사가 되었다.

여성대통령이 나오고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속에 떠밀리며 지금도 자살을 생각하는 수많은 아이와 가난한 자들이 있는 오늘, 대한민국에서 나는 춤추리라. 그 모든 폭력이 사라지고 평화가 깃들도록.

이은주 <문학치료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