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이야기가 울리는 방

  • 입력 2013-04-08  |  수정 2013-04-08 07:24  |  발행일 2013-04-08 제23면
[문화산책] 이야기가 울리는 방

며칠 전 할아버지가 된 한 시인을 만났는데 그는 다섯 살짜리 손녀 보는 즐거움을 자랑했다.

“딸각, 문을 잠그고 이불을 펴고는 나를 누우라고 해. 그리고 이야기를 내놓으라는 거지. 한 10개 정도는 해야 잠이 드는 거야. 그래서 손녀가 오는 날이면 곤혹스러워진다니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대니. 그래 할 수 없이 안데르센 동화에서부터 어릴 적 어머니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들까지 구석구석 기억을 뒤지며 해주잖아. 그러면 ‘호랑이와 곶감’ 같은 얘기는 ‘그건 요즘 시대에 너무 안 맞아요’ 하는 거야. 허, 참! 커서 뭔 일 낼 거야.”

이미 흙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해주신 이야기가 백발의 할아버지 목소리를 통해 다섯 살 아이에게로 전해지고, 그 아이가 자라서 또 그 아이에게 전해지리라. 나는 어릴 적 할머니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다. 삼국지, 최치원 설화나 여우누이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를 말이다.

추운 겨울날 이불 속에 다리를 묻고 우리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입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할머니는 벽장 안에서 혹은 속바지 주머니께를 더듬으면서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야 한다며 뜸을 들이곤 하셨다. 여우누이 같은 이야기는 하도 여우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들을 실감나게 해서 어찌나 무서웠던지 “할머니, 그냥 말 해, 그런 소리 내지 말고”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나중에 커서 만났던 탈무드 속의 이야기들은 거의가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었고, 어쩌면 내가 지금 동화를 쓰게 된 것도 바로 그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수많은 책이 쏟아지고 있다. 부모나 교사는 아이들에게 많은 책을 읽도록 권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로 들려주는 것이 몸과 마음에 더 큰 울림을 주며, 몰입하고 상상하게 한다. 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 소리가 울리는 방은 죽은 글자와 사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오르는 공간이며, 서로를 연결하고 치유하며 그렇게 역사가 흐르는 공간이 된다. 나도 그 방에 다시 들고 싶다.

이은주 <문학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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