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나의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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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3-31  |  수정 2014-03-31 07:49  |  발행일 2014-03-31 제23면
[문화산책] 나의 수호천사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헤아린다는 이순(耳順)을 넘은 나이에도 목련이 피고 산수유가 만발할 즈음이면, 추억 하나가 쏘옥 고개를 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버지는 친구분과 술자리에서 사돈 약속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두 분끼리만 나눈 말이라 당사자인 나는 물론 가족 아무도 모른 채 세월은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어떤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가 나를 괴롭히면 수호천사처럼 나타나 지켜주는 동급생 소년이 있었던 것이다. 쉬는 시간, 여학생들이 운동장 느티나무 그늘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면 남학생들이 몰려와 고무줄을 끊어버리고 도망가곤 했는데, 그 소년은 그걸 말리다가 두들겨 맞기도 했다.

각자 다른 중·고등학교, 대학에 진학해 까맣게 잊고 살던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머리 타박타박하고 나를 지켜주던 소년의 편지였다. 부모님들끼리 한 약속 이야기와 안부, 초등학교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담긴 편지였다. 아버지께 확인해 보았더니, 옛적 술자리에서 그런 농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단다. 그제야 그 소년이 나에게 왜 지극정성이었던지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우린 그것을 빌미 삼아 서로의 생각을 나눌 만큼의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터라, 다시 세월이 흘러갔다.

지천명이 지나고 이순을 바라볼 즈음, 초등학교 동창회를 연다는 연락이 왔다. 불현듯 스치는 그 소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떤 부인을 만났으며 자녀는 몇일까?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50년이란 세월은 접어둔 채, 어릴 때의 모습만 떠올리면서 약속 장소에 갔다. 이럴 수가!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만 앉아 있지 않은가! 벌써 세상을 떠난 친구도 있단다. 친구들의 면면에는 그동안의 삶이 고스란히 쓰여 있었다. 정신을 차려 나를 아껴주던 친구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찾을 수 없었다.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을 탐색하던 차, 키는 작고 배는 불룩한 대머리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조심스레 다가가는 순간 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토록 순박하고 귀여운 소년이 이렇게 변하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땅꼬마 소녀가 머리 희끗한 늙은이로 나타날 줄 몰랐던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가 지나서야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고, 그동안의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잊고 살았던 긴 세월,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꿈을 실현하고 있었다.

이재순<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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