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권력은 부엌에서 나온다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4-05-29  |  수정 2014-05-29 08:08  |  발행일 2014-05-29 제19면
[문화산책] 권력은 부엌에서 나온다

지난 연말 잘 아는 공무원의 정년퇴임을 기념한 술자리에 참석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 필자는 주인공에게 먼저 퇴직한 입장에서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요리 10개를 배우라는 것. 그것도 어렵다면 김치찌개, 미역국, 카레라이스 3개만이라도 배우라고 했다. 그 선배는 “그래 그래”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동석한 공무원들은 분위기를 깬다는 듯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둘째, 좋아하는 역사책을 읽더라도 머리에 그만 집어넣고 이제는 그 지식을 나누어줄 방법을 찾으라고 했다.

요리를 배우라는 것은 이제 혼자 밥을 해결할 수 있어야하고, 가족을 위해 가끔씩 음식을 만들어 주라는 뜻이었다. 직장을 다닐 때만 해도 부인이 따뜻하게 맞아줬지만, 퇴직한 남편이 집에서 버틸 때 달갑게 여기는 부인이나 딸, 며느리는 없다. 처음에는 그동안 고생했으니 마음껏 쉬라고 하지만, 한두 해가 지나면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이 된다. 부인이 남편을 애물단지로 취급한다. 퇴직한 뒤 최소한 김치찌개를 끓여 혼자 밥을 해결할 수 있고, 아내 생일날 미역국은 챙겨줄 수 있어야 한다. 네 살 외손자에게 카레라이스까지 해준다면 멋진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들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면, 다른 메뉴도 충분히 가능하다.

며칠 전 작년에 만났던 그때 그 사람들과 다시 술자리가 있었다. 그 선배에게 “이제 김치찌개를 잘 하느냐”고 안부 인사를 했다. 당사자는 뜬금없다는 눈빛을 지으며 “김치찌개는 왜”라고 되물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일행 한명이 작년에 있었던 필자의 당부를 일깨워주었다. 선배는 “그랬냐”며 “허허” 웃었다. 멋쩍은 생각에 “형수가 좋은 사람이거나 아직 실감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은퇴한 남성의 권위는 퇴임과 동시에 추락하지만, 그 추락의 폭은 가족 영역이 훨씬 크다.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 남성들은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자신의 몫이고 가정의 일은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어려서부터 부엌을 드나들지 말아야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은퇴한 남성은 아내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 자녀들과의 대화도 신통치 않다. 자녀들은 아내를 매개로 하는 2차적 관계를 형성해왔기 때문이다. 아내가 없으면 가족관계에서 고립된 ‘섬’이다. 그래서 부엌을 장악하는 것도 중요한 반전(反轉)의 시작이다.
이제상 <행복한가족만들기연구소 소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