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연호지(蓮湖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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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5-30  |  수정 2014-05-30 07:17  |  발행일 2014-05-30 제18면
[문화산책] 연호지(蓮湖池)의 추억
배 철 <수필가>

50여년 전, 예기치 않은 병에 걸려 큰 고생을 한 적이 있다. 가끔 기침이 나고, 오후에는 열이 심하고, 때로는 가래에 피가 묻어나기도 했다. 꼭 폐결핵 증세 같기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도 찍고 혈액검사를 했는데, 뜻밖에도 만성기관지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심신을 편안하게 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대구 외곽의 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그때 갑갑한 병원에서 나와 수시로 찾아간 곳이 바로 연호지(蓮湖池)였다.

지금도 연호지의 풍경은 한적하고 아름답지만, 그때 호수 주변은 마치 엽서 속 풍경 같았다. 연호지의 동·남·북쪽은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서편에는 못둑이 곧게 쭉 누워 있었다. 또 호수의 물은 바닥의 모래가 환하게 보일 만큼 투명했으며, 넓은 수면은 청옥빛으로 조용하게 펼쳐졌다. 다만 연호지 주변의 산은 대개 민둥산이 많아 좀 아쉬웠다. 못둑에도 작은 버드나무 한 그루 없어 조금은 휑하게 느껴졌다. 도시에서도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못둑에 있는 작은 버드나무 한 그루라도 땔감을 하려고 사람들이 베어갔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때 고교생이었던 나는 비록 몸은 아팠지만, 연호지의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삶과 인생을 사유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 연호지에서 보낸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들이 바탕이 돼 지금까지도 평생 문학을 가까이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연호지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면 잊지 못할 한 장면이 있다. 하늘이 청명하고, 연초록의 신록이 깊어가던 딱 이맘때의 봄날이었다. 나는 연호지에서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을 읽으며 살포시 잠이 들었다. 그때 꿈결에서 들려오던 한 소녀의 목소리, “어머나, 고상한 환자 오빠야네. 초록 못둑에서 이양하의 ‘신록예찬’을 읽다가 잠이 들었나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봄햇살만큼이나 밝고 싱그러운 소녀 2명이 까만교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소녀들은 나를 마치 비운의 문학지망생인 줄 알았던지 열심히 문학공부를 하라는 등 온갖 희망적인 얘기를 해주며 반나절을 곁에 머물러 주었다.

그리고 50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도 가끔 연호지에 들르면 50년 전 봄날에 만났던 어린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임들에게는 이 봄에 떠오르는 기억 속에 묻어둔 애틋한 추억 하나 없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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