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트로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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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15 07:50  |  수정 2020-01-15 08:02  |  발행일 2020-01-15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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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소설가>

전국에 송가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미스트롯' 종영 이후 이번에는 '미스터트롯'이 시청률 고공행진 중이다. 중장년층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되던 '트로트'와 젊은층에 익숙한 '서바이벌 오디션' 장르가 합쳐진 이 프로그램은 '뉴트로(New+Retro)'라는 키워드로 설명되기도 한다. 국민 대통합의 아이콘 유재석이 '유산슬'이라는 예명으로 트로트 음원을 발매하고, 김영철의 '따르릉'이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한 사례 등을 보면 요즘 트로트가 세대를 불문한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자면 나는 가슴 시린 발라드보다 경쾌한 트로트를 선호하는 편이다. 고등학생 때는 mp3 안에 트로트 음악을 몰래 넣어놓고 듣기도 했는데, 장윤정부터 혜은이까지 스펙트럼이 꽤 넓은 편이었다. 청소년과 트로트의 조합을 매우 어색하게 여기던 시절이었으므로 남들 앞에서는 내가 '뽕짝'을 듣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 이어폰 한 쪽을 빼서 자기 귀에 꽂은 친구의 돌발행동 때문에 나의 은밀한(?) 취향을 들킬 뻔한 적도 있었다.

요즘 인기 있는 트로트 음악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비트가 빠르고 가사가 직설적이며 가볍고 유쾌한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들은 자신의 사랑을 '재개발'에 비유하는가 하면("금싸라기 같은 내 맘에 전철역을 내어줘요" 유산슬 '사랑의 재개발') 이별의 서사에 언어유희를 사용한다("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인데 왜 우리는 갈라서야 하나" 유산슬 '합정역 5번 출구'). 나를 욕하는 옛 연인에게는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니가 먼저 꽁무니 뺐지 내 탓을 하지 마" 김영철 '따르릉') 또 쿨하게 잊어버린다("알잖아 내가 너 말고도 님이 많아서" 홍진영 '잘가라').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기보다는 솔직한 이별의 소회를 밝히고, 심각한 사랑에도 유머를 가미할 줄 아는 이들의 이야기는 트로트의 단순한 멜로디와 만나 감칠맛을 낸다. 때로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되는 일을 단순화해버리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처음으로 트로트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때가 한창 대입 준비로 골머리를 앓던 수험생 시절이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닌 듯도 하다.

"인생의 많은 고통을 평행시키기 위해 하늘이 두 가지 것을 주었으니, 희망과 잠이라고 했다. 그는 웃음을 첨가했어야 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버거운 삶의 문턱을 경쾌한 리듬으로 뛰어넘는 트로트의 힘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궁금하다. 오늘은 김연자 노래로 힘차게 아침을 깨워본다.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김세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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