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2] 영주 소수서원(상)...朱子 강학했던 백록동서원이 모델, 입구엔 870여 그루 '학자수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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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4 07:54  |  수정 2021-07-05 13:40  |  발행일 2020-09-24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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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은 '학자수림'으로 불리는 입구 소나무숲이 유명하다. 창건 이후 꾸준히 심어 관리한 300~500년 된 소나무 870여 그루가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교육이란 반드시 현인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사당을 세워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이니, 교육은 실로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

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이 소수서원(경북 영주)을 세운 후 남긴 기록이다. 소수서원은 주세붕이 풍기군수 시절인 1543년에 지역 사림의 힘을 모아 건립한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설립 당시 이름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죽계천이 흘러가며 만들어낸 수려한 경관 속에 자리하고 있다. 죽계천이 서원 동쪽을 돌아 흘러가고 있는데, 건물과 주변 자연의 조화가 돋보인다.

주세붕은 고려 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해 연구한 안향(1243~1306)이 젊은 시절 공부하던 곳인 숙수사(宿水寺) 터에 문성공(文成公) 안향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세우고, 사당 옆에 강학당을 지어 백운동서원을 창건했다. 성리학을 확립한 중국의 주자가 1178년 장시(江西)성 난캉(南康)의 지사(知事)로 부임하면서 중수한 뒤 직접 원장이 되어 강학하며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애썼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델로 삼아 설립했다. 백록동서원은 장시성 여산(廬山) 아래에 있다.

◆최초 사액서원

백운동서원은 이황(1501~1570)이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듬해인 1549년 12월 이황은 경상도관찰사에게 중국 송나라의 선례에 의거, 서원의 교육기능 강화를 통한 국가 인재 양성을 위해 서책과 편액, 토지, 노비 등을 지원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해 달라는 글을 올렸다.

'우리나라 교육은 중국의 제도를 좇아 서울에 성균관과 사학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으나 서원이 없는 것이 큰 흠이었는데, 주세붕 군수가 주위의 비웃음과 비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에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교육기관이란 반드시 나라의 인정을 받아야 오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근원 없는 물과 같아서 아침에 가득했다가도 저녁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또 주세붕 군수와 안현 감사가 아무리 설비를 잘해 놓았다 할지라도 이는 한 군수와 방백이 한 일이라 임금의 명령을 받아 국사에 오르지 못하면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께서는 위에 아뢰어 송나라 때의 예와 같이 서적과 편액, 토지, 노비를 내리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
명종 윤허로 첫 사액서원에
소수서원 친필 편액도 하사

정문 앞 건립 '경렴정' 눈길
세계유산 서원 중 유일 정자
유생들 풍류 즐기던 휴식처

이황의 글 중 일부다. 1550년 조정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고, 대제학 신광한(1484~1555)이 지은 '소수(紹修)'라는 명칭을 명종 임금이 윤허함으로써 서원 이름으로 정했다. 그리고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편액을 하사했다. 당시 명종은 16세였다. 이로써 최초로 나라의 공인을 받은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탄생했다. '소수'는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소수서원 이후 서원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향촌 사회의 교화를 통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조선시대 지식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소수서원 입학 정원은 처음에는 10명이었으나 사액 이후에는 30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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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수림이 끝나는, 서원 정문 앞에 있는 정자 경렴정.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정자로, 주세붕이 쓴 '경렴정' 현판이 처마에 달려 있다.

◆명품 송림 '학자수림'

소수서원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멋진 소나무 숲을 마주하게 된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탐방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노송 군락이다. 선비들이 그 기상을 닮으라는 의미에서 '학자수(學者樹)'라 부른 적송 870여 그루가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 청정한 기상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수령은 300~500년.

이 송림과 관련, 1586년과 1614년에 이 지역 선비들(황응규, 이준)이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564년 정월 25일에 소나무 1천 그루를 심어 500그루가 살아남았는데, 소를 방목하거나 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잘 관리하고 오솔길을 가다듬으며 사이사이에 소나무를 보완해 심어 무성하게 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도 '소수서원 잡록'에 담겨 있다. 1757년 봄부터 1758년 봄까지 소나무를 보충해 심었다는 기록도 있다.

학자수림이 끝나는 곳에 높이 4m의 숙수사터 당간지주가 서 있어 이곳이 숙수사가 있던 곳임을 알게 한다. 숙수사는 1458년에 화재로 타버렸으며, 보물 제59호인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서원 입구(志道門) 앞에 서 있는 정자 경렴정(景濂亭)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경렴정 뒤쪽으로 죽계천이 흘러가고, 그 건너편 오른쪽 천변 솔숲 속에 자리한 정자 취한대(翠寒臺)가 각별한 풍광을 선사한다.

서원에 이처럼 정자가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세계유산 서원 9개 중에는 소수서원이 유일하다. 경렴정은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풍류를 즐기던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다. 주세붕이 서원 건립 때 지은 정자다. 서원이 일정한 틀을 갖추기 전이어서, 누문(樓門)이 없는 대신 이런 정자가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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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강당 처마에 걸린 '백운동' 현판. 사액 전 '백운동서원'에 걸려 있던 것으로, 주세붕의 글씨로 추정된다.

◆다른 서원에는 없는 정자 건물

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濂溪) 주돈이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 첫 글자를 따와 '경렴(景濂)'이라 지은 것이다. 경렴정의 초서 현판은 이황의 문인인 고산(孤山) 황기로가 이황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정면 처마의 해서 '경렴정' 글씨는 주세붕이 썼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이황 등의 시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바로 옆에는 수령 500여 년의 은행나무 고목이 서 있다.

경렴정 앞의 서원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강당인 명륜당이 눈에 들어온다. 이 명륜당 안에 명종 임금 글씨의 '소수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처마에는 '백운동' 현판이 걸려 있다. 제작 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1543년 백운동서원 건립 당시의 현판을 1610년 봄에 새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세붕 글씨로 추정된다. 명륜당 뒤편에 학생과 스승과 서원 임원들이 기거하던 직방재·일신재가 있고, 그 오른쪽에 학생들의 공간인 지락재·학구재가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소수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가진 다른 서원들과는 달리, 강당의 서쪽에 안향을 기리는 사당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대부분 사당은 '사(祠)'라고 부르지만, 나라에서 인정하고 임금이 윤허한 특정한 사당만을 '묘(廟)'라 칭한다. 소수서원의 사당은 그 위상이 각별함을 알 수 있다. '묘'로는 역대 임금들 위패를 모신 종묘, 공자를 기리는 문묘가 있다.

사당에는 안향과 안축(1282~1348), 안보(1302~1357), 주세붕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안축과 안보는 안향의 후손이자 이 지역 출신으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높은 학자였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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