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5] 안동 도산서원(하)...왕명으로 일곱 번의 치제 봉행…"오직 영남만 정학을 빼앗기지 않았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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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09 07:38  |  수정 2021-07-06 15:39  |  발행일 2020-11-09 제20면
팔작지붕 특징인 사당 '상덕사' 위판 도난 등 수차례 변고
지난달 제례땐 유교역사 최초로 여성 초헌관이 술잔 올려
정조 치제 다음날 열린 도산별과 기념 위해 '시사단' 조성
안동댐 수몰로 그 자리에 10m 높이의 인공섬 만들어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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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호에 떠 있는 도산서원 시사단(詩社壇) 풍경. 지난달 초 모습이다. 시사단은 안동댐이 생기면서 원래 자리에 10m 높이로 축대를 쌓아 옮긴 것이다.

서당과 서원의 중요한 차이는 사당 유무다. 서원에는 있고 서당에는 없다. 서원 사당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도산서원 사당의 역사를 통해 살펴본다.

도산서원 건물 중 가장 뒤쪽 높은 곳에 있는 사당(보물 제211호)에는 이황과 그의 제자인 조목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 이름은 상덕사(尙德祠)다. 퇴계 이황 선생의 덕과 가르침을 숭상하고 본받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원 사당은 이처럼 이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도동서원이나 남계서원처럼 없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고 근엄한 맞배지붕으로 구성하는데, 상덕사는 팔작지붕인 것이 특징이다. 이 안 정면 중앙에 남향으로 '퇴도 이선생(退陶 李先生)' 위패를 모시고, 동쪽 벽 앞에 서향으로 '월천 조공(月川 趙公)' 위패를 종향위(從享位)로 봉안하고 있다. 상덕사는 1574년 봄에 완공하고 여름에 사액을 받았으며, 1576년 2월에 이황의 위패를 봉안했다.

◆사당 상덕사 이야기

상덕사에서는 정기적 의례와 비정기적 의례가 봉행되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초닷새 날에는 세배를 올리는 정알례(正謁禮)를,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에는 제사를 지내는 향사례(享祀禮)를 봉행한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분향 참배하는 향알례(香謁禮)를 올린다.

비정기적 행사로는 조선 시대 왕명으로 일곱 번의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 죽은 신하의 제사 지내던 일)가 있었다. 그리고 퇴계 선생과 서원에 관련된 사안이 있을 때 아뢰는 고유례(告由禮), 선비들이 인사를 드리는 알묘례(謁廟禮)가 봉행된다.

코로나19는 도산서원 향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3월5일(음력 2월11일) 오전 11시에 봉행된 봄 향사례는 평소보다 참석 범위와 절차를 줄여 진행했다. 당초 서원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맞아 여성인 이배용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을 초헌관으로 삼아 대규모로 봉행하려고 했다. 이배용 이사장은 가을 향사 때인 지난 10월1일 제사 때 초헌관으로 첫 술잔 올렸다. 한국의 서원 6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도산서원 향사에서 여성이 초헌관을 맡는 역사를 쓰게 됐다.

상덕사는 건물이 10차례 정도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에 봉안된 위패도 몇 차례 변고를 당했다. '도산서원 묘변시일기(陶山書院 廟變時日記)'에 기록된 내용이다.

'1901년 동짓달 초하루 아침 일찍 분향례를 위해 묘정에 들어가니 사당 문 자물쇠가 부서졌고, 사당에는 원위(元位:퇴계 위패) 의탁(椅卓)이 비어 있고 독(위패 함)은 제상 위에 있었다. 종향위 위판은 서쪽 협문 안에 옮겨져서 분면(粉面)이 벗겨져 있었다. 또 서쪽 담에 도적이 든 흔적도 있었다. 사당의 퇴계 선생 위판이 없어진 변고가 생겼다. 이 사건이 황성신문에 보도되고, 11월21일에 임금께서 위판목을 하사해 12월17일 10시경에 운정(雲庭 : 이원호 1860~1919)공이 다시 써서 봉안하고 예안군수를 겸임한 봉화군수가 위안제를 봉행했다. 이 위안제에 5천~6천명이 참례했다.'

원래 위판은 이듬해 2월 월란정사 앞 강 가운데 바위에서 발견돼 도산서당에 모셨다가 3월7일 상덕사 뒤 깨끗한 곳에 묻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809년 5월 초하룻날 함안에 사는 박형옥 등이 알묘 후 봉심을 할 때 종향위의 독이 열려 뱀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원임(院任)들에게 알렸다. 처음 있는 중대한 일이라서 의논을 거듭하다가 9월4일 회의에서 결정, 김종수(1761~1813)가 개제(改題)해 11월16일 오전 6시경에 다시 봉안했다. 또 1901년 묘변 시에 종향위 위패에도 분면이 벗겨져 다시 써서 원위 봉안 때 다시 모셨다.'

◆정조가 내린 전교(傳敎)

1792년 3월3일 정조 임금이 내린 명령의 내용이다.

'정학(正學)을 높이려면 마땅히 선현을 높이 받들어야 한다. 사신이 그 지역에 들어감에 어제 옥산서원에 치제하도록 명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옥산서원에만 치제를 하고 도산서원에는 치제하지 않는다면 옳겠는가. 요즘 사학(邪學:천주교)이 점차 퍼지고 있다. 오직 영남의 인사들만 선정(先正)의 정학을 조심스럽게 지켜 꺾이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의 한 없는 그리움이 더해졌다. <중략> 각신(閣臣) 이만수가 명을 받들고 돌아오는 길에 예안으로 달려가 선정 문순공 이황의 서원에 치제하도록 하라는 제문을 지어 내려 보내겠다. 미리 내각에 당부해 감사가 알도록 하고, 감사가 순시하면 즉시 해당 고을에 알려라. 선정의 자손들과 인근 고을 인사들이 와서 치제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은 미리 와서 모여 기다리도록 하라. 치제 날에 각신은 전교당에 자리를 정해 앉아 여러 유생을 불러 진도문 안뜰에 세우고, 지니고 간 서제(書題)를 걸어 보이도록 해 각기 글을 짓도록 하고 시권(詩卷)을 거두어 조정에 돌아오는 날에 보고하라. 이렇게 하면 작은 고을에 준비하느라 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조정에 당부해 경상감사가 곡식을 준비하도록 하라.'

이 전교와 정조가 지어 내린 치제문은 3월8일에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이후 준비를 거쳐 3월24일 치제가 봉행됐다. 하루 전날 사당에 고유를 올렸는데, 참석자가 몇 천명인지 헤아릴 수 없었고 사람이 많아 술과 음식을 다 제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고유문 내용이다. '임금의 높고 밝은 덕이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를 붙드시니, 이에 보살핌이 남으로 돌아보아 제사로 융숭하게 보답하고 선비들에게 과거를 보이시니 사문(斯文)이 더욱 기뻐하여 장차 일을 시작하려 함에 삼가 그 사유를 아룁니다.'

전교와 치제문 현판은 도산서원 전교당에 걸려 있다.

3월25일에는 별과가 진행됐다. 진시(오전 7~9시)에 유생이 넘쳐나 1만명으로 제한하고, 사시에 시제를 소나무에 걸었다. 답안지는 신시(오후 3~5시)에 거두니 3천730장이었다.

과거시험은 선비들이 예상 밖에 많이 모여 도저히 서원 경내에서 치르기 어려워 강 건너 송림에서 치르게 되었다. 시험장에 들어온 선비는 7천228명이었다고 한다. 4월16일 합격자 30명이 발표됐다.

이 도산 별과를 기념하기 위해 1796년에 단을 쌓아 채제공(1720~1799)이 짓고 쓴 비문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현재의 시사단(詩社壇) 비와 비각은 182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1975년 안동댐으로 인해 물속에 잠기게 되면서 그 자리에 10m 높이로 축대를 쌓아 올려 인공섬을 만들어 옮겨놓았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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