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고고학으로 본 선사시대의 대구 사람들

  •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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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08   |  발행일 2022-04-08 제21면   |  수정 2022-05-06 18:06
5만년 전 구석기 때부터 대구에 사람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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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임당동고분군 발굴 모습. (출처:국립대구박물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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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서변동 출토 빗살무늬토기.(출처:국립대구박물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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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대봉동 출토 석촉. (출처:국립대구박물관 2001)

대구지역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고학 자료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최근까지 대구지역에 사람이 거주한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고고학적 발굴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어 그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2000년대 이전에는 대구의 역사를 청동기시대였던 기원전 10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보았고, 그 역사가 약 3천년 정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2001년 국립대구박물관에서는 '대구 오천년'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게 된다. 이 전시에서는 그 당시 새롭게 발굴된 대구 상동유적과 서변동유적의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등을 근거로 대구 역사의 시작을 5천년 전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대구 오천년'이라는 제목을 내걸었던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서변동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가 발굴되었을 뿐만 아니라 월성동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대구지역 인간 활동의 역사를 약 2만년 전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대구 월성동 777-2 일원 유적이나 달성군 도동리유적,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상촌리유적,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관하리유적에서 구석기시대 중기로 추정되는 다면석기, 찍개, 자르개 등이 출토되었으며, 칠곡 석적면 중리유적에서도 르발루아 돌망치, 찍개 등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들은 대구와 그 주변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달성 하빈면 대구교정시설 건립부지서 발굴된 유적
중기구석기로 밝혀져 대구역사 5만~7만년전 시작 추정

지역 곳곳 지석묘군 존재…청동기시대 정착집단 유추
4개 무리 나뉘어 하천 충적지에 적지 않은 주민 거주



특히 2017년 3월부터 6월까지 실시된 대구 달성군 하빈면 대구교정시설 건립공사 부지인 달성 감문리유적 발굴조사에서 대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중기구석기시대 유적임이 밝혀지면서 이제는 대구 역사의 시작을 약 5만~7만년 전까지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의 사용, 정착 생활과 농경의 본격화, 지석묘와 석관묘 등 새로운 묘제의 출현, 사회 분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진행, 사회적 갈등의 증대와 통합 필요성의 증대와 같은 정치·사회적 특성이 드러나고 무문토기 문화가 출현하는 것을 청동기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그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전후에 시작해 철기가 북한의 서북지역에 출현하는 기원전 300년 전후에 끝이 난다고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지석묘와 주거지가 대표적인데 대구지역에는 골아가리토기와 공열문토기가 출토되는 주거지와 많은 지석묘군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여러 곳에서 정착 집단이 생활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최근 발굴조사에서는 생활유적도 많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생활유적은 주거지와 토기 및 석기 산포지가 대표적인데 주거지는 대봉동, 월성동, 동천동, 시지동, 서변동, 상동 등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토기 및 석기 산포지로는 신천의 하류역인 금호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연암산유적과 침산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주거지 유적 중 월성동과 팔달동유적은 구릉 위에 입지하고 서변동, 상동, 대봉동, 동천동 등의 주거지는 하천변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대구지역에는 구릉이나 하천변 충적대지에 사람들이 주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주거지에서는 화살촉, 간돌검, 도끼, 반달칼, 돌낫, 굴지구 등 수렵과 농경도구로 사용된 석기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동천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경작유구도 확인된 바 있어 당시 대구지역 사회의 생업은 농경과 수렵, 어로, 채집 등이었으며 농경의 비중이 점차 높아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구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취락유적으로는 서변동유적과 대봉동유적이 있다. 서변동유적은 동화천 근처의 충적평야지에 신석기시대 주거지와 집석 유구, 청동기시대 주거지 47동을 비롯해 지상식 건물지와 돌널무덤 등 선사시대의 마을이 확인되었다. 이 마을은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까지 주거분포를 달리하며 사용된 유적이다. 대봉동유적은 신천 서안의 충적지에 자리한 유적으로 주거지와 구덩이, 도랑 등이 확인되었다. 이 마을의 지리적 범위는 동서 500m, 남북 300m 이상으로 아주 큰 마을이라 할 수 있다.

대구에는 청동기시대 무덤을 대표하는 지석묘가 다수 분포하고 있는데, 권역별로 지석묘의 매장주체부 구조가 달라 집단마다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석묘는 입지와 지형 조건에 따라 4개 정도의 무리(群)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신천의 좌우안에 위치한 것으로 수성구 파동, 상동, 중동의 지석묘와 남구 이천동 지석묘, 중구 대봉동, 봉산동, 삼덕동의 지석묘, 칠성동 지석묘군 등이다. 둘째는 달서구 일원의 진천동, 월성동, 상인동 등지의 지석묘다. 셋째는 금호강 남안의 시지동, 매호동, 사월동 등지의 지석묘이며 넷째는 금호강 북안의 율암동, 동내동 등에 분포한 지석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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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이렇듯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나 출토유물에서 보면 이 시기 대구지역에는 신천과 금호강 충적지 위에 적지 않은 주민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취락을 형성하고 무문토기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농경과 어로활동을 통해 생활을 꾸려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대구지역 내 각 단위집단 내부에는 일정한 수준의 계급분화가 이루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지석묘 자체가 개인을 위한 묘제이며 또 그것이 집단적인 노동력 동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지배자의 무덤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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