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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법조인은 좋은 직업이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인생의 롤모델이 될 만한 좋은 선배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일제나 독재라는 거악(巨惡)에 분연히 맞선 김병로 전 대법원장이나 이병린 전 대한변협회장, 조영래 변호사를 비롯하여 직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선배가 많다. 하물며 같은 시대를 살면서 훌륭하신 선배 법조인들을 곁에서 바라보면서 느끼는 존경심은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을 향한 팬심 못지않다. 생전에 윤산(允山) 이홍훈 전 대법관님을 바라보는 필자의 존경심 역시 그랬다. 흔히 말하는 KS(경기고-서울법대) 출신의 수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장과 대법관을 역임한 엘리트 법관이어서도 아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리는 따뜻함과 올바름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근로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수많은 판결, 환경법 분야 전문가로서 아파트 일조권 침해를 최초로 인정하는 판결과 4대강 사업 대법원판결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 보전의 필요성을 강조한 소수의견 등 개혁성향의 판결로 표현되는 강직한 이미지와 달리 사석에서는 한없이 소탈하고 푸근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분이었다.
대법관 퇴임사 말미에 "대법관 이홍훈"이 아니라 "법관 이홍훈"으로 기재한 사실은 평생 법관직을 소명으로 간직하며 살아오신 자부심과 겸손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회자된다. 퇴임 후에도 도장값만 몇천만 원이 넘는다는 대법관의 전관예우를 던져 버리고 로스쿨 석좌교수, 법조윤리협의회 이사장, 법무법인 화우 공익재단 이사장 등 교육과 공익 활동에 전념하셨다.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사단법인 윤산평화법제포럼'의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홍훈 대법관께서 생전에 기틀을 닦아놓으신 포럼으로, 통일을 위한 교류협력 법제연구를 통하여 남북한 가치관의 통합과 평화통일의 안착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을 목적으로 2022년에 설립되었다.
평화라는 개념에는 통일, 통합이 당연히 포함된다. 평화와 통합을 지향하는 단체의 성격에 걸맞게 호남 출신의 존경받는 법조인을 기념하는 포럼의 대표자는 대구대 법학부 최철영 교수께서 맡고 있으며, 통일법제에 관심이 많은 소장기예한 젊은 변호사들과 학자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직역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필자는 대한변호사협회장과 서울지방변호사회장으로 재임하면서 변호사를 포함한 법조계 내부의 속사정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하였다.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겠다는 신념하에 정계로 진출한 후 여야 모두에서 개혁의 목소리를 내면서 활동하는 청년 변호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변호사 자격증을 정치판으로 뛰어드는 발판으로 생각하는 젊은 변호사, 법조계의 엘리트 코스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금배지에 집착하는 전관 변호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으니 권력이라는 감투를 쓰기 위해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중견 변호사도 많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정의와 신념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하시며 후배들에게 귀감을 보여준 이홍훈 대법관님의 존재가 더욱 그리워진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시절 운이 좋아 훌륭하신 선배님과 함께하며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대로 후배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을 내본다. 이런 욕심은 윤산 어른께서도 애교로 봐주시지 않을까 싶다.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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