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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그래픽=장수현 기자 |
"아버님(혹은 어머님)! 저는 이번 추석 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친척 어른들께 인사하고 조카들과 놀아주기 싫습니다. 가족·친척과 오순도순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것은 더더욱 싫습니다. 친척 댁에도 가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가족·친척이라도 타인들에게 제 삶을 평가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휴식을 취하고 싶습니다. 추석 연휴 내내 아무도 제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지금으로부터 20~30년 전, 추석 연휴를 앞두고 부모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니냐. 어찌 그러냐' 또는 '너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다가 외톨이가 된 것 아니냐' 또는 '친척 어른들이 얼마나 섭섭해하겠느냐' 등의 핀잔을 듣게 될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명절다움'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송편을 빚거나 장시간 귀성길에 오르는 것이 대표적인 명절다운 모습이었다. 1990년대 신문에서는 명절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웃고 있는 사진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 시절 명절 연휴를 보낸 이들에게는 비슷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친구를 만나거나 영화를 보러 외출했다가도 가족·친척과의 식사 시간에는 약속이나 한 듯 집으로 돌아와 한가득 차려진 명절 음식을 나눠 먹던 기억. 그럴 때는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고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결핍이 많았던 시절이지만, 명절 연휴 때만큼은 모든 게 풍요로웠다. 하지만 늘 좋기만 했을까. 어색한 친척과 어색한 자리에 앉아 의무적으로 음식을 삼키다가 나중에 소화제를 찾던 기억도 한편에 남았을 수 있다.
아이 시절엔 그저 고소한 전과 송편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는, 집안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추석 분위기가 좋았다. 친척들에게 용돈도 받을 수 있으니 은근히 명절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명절이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부담은 경제적 부담일 수도, 육체적 혹은 정서적 부담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에 대한 회의감과 피로감일지도.
'탈(脫)명절'에 대한 생각이 고개를 들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의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솔직히 명절 분위기를 떠나 도망칠 곳도 많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명절 연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명절 연휴를 보내는 방식이 훨씬 다양해지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도 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명절의 전통과 가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연휴를 보내는 사람도, 아예 명절이라는 것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연휴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삶에 있어 더 이상의 관습, 형식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자유로운 정신의 사람들에게 도대체 명절이 무슨 대단한 의미겠는가.
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명절이 좋은 사람도, 나 홀로 자유롭게 보내는 명절이 좋은 사람도 있다.
늙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젊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성급히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람은 다 다르기 때문에 선호하는 명절 연휴의 모습도 다른 것일지 모른다.
보다 다채로워진 명절의 모습이 새삼 반갑다. 명절이 점점 알록달록해지고 있다. 색색의 추석 송편들처럼 말이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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