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숫자의 함정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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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27  |  수정 2023-12-27 06:59  |  발행일 2023-12-27 제26면
마라톤 등 장거리 달리기

속도와 보폭 조절이 중요

정작 수치에만 매몰되면

달리는 즐거움 잊어버려

인생서도 똑같이 적용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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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530, 500, 430…. 장거리 달리기를 하면 항상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숫자다. 많은 러너(runner)들은 지금도 손목에 찬 시계를 수시로 보면서 화면에 떠 있는 이 숫자를 확인한다. 암호 같은 숫자 조합은 분·초를 생략한 1㎞ 구간 속도(pace)다. 쉽게 말해 어떤 구간의 1㎞를 평균적으로 몇 분, 몇 초대로 뛰는지 나타내는 수치다. 1㎞ 뛰는 데 평균 5분이 걸렸다면 500, 5분30초가 소요됐다면 530페이스다.

마라톤 등 장거리 경기는 적절한 수준의 보폭과 속도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보다 지속적으로 빠르게 달린다면 탈진할 가능성이 크고 너무 느리게 달리면 원하는 기록에 근접할 수 없다. 따라서 경기 중 작전을 세우고 속도를 조절하게 되는데 '1㎞ 구간 페이스'가 자신의 기준점이 된다.

이에 장거리 경기를 준비하는 이들은 항상 1㎞ 구간 페이스를 끌어올리는 연습을 하게 된다. 하지만 페이스에만 몰입돼 '달리는 즐거움'을 놓칠 때가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경기를 앞둔 것도 아닌데 뛸 때마다 심박 수를 재고 속도 조절에 1분당 보폭 수까지 일일이 신경 써 가며 달리다 보면 '현타'가 오기 마련이다. 이런 주객전도가 없다.

로드 자전거를 타도 마찬가지다. 일부 동호인들은 평균 속도와 케이던스(cadence·분당 회전수), 페달링 파워 등에 지나치게 목을 맨다. 마치 목표로 삼은 숫자를 기록하지 못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숫자 지키기에 애를 쓴다. '스트라바(Strava)' 같은 주행 기록 저장 앱을 사용한다면 숫자의 노예가 돼 있을 확률은 더 높아진다.

숫자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숫자의 발명으로 추상적이고 정성적인 개념을 정량화할 수 있게 됐고, 수학의 발전과 함께 인류의 논리적 사고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숫자는 하나의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정량화 특성은 비교를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비교에 민감하다. 특히 현대 사회는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무엇이든 비교가 가능한 세상이기에 그 여파는 더욱 크다. '지난날의 나'는 물론 세계 각국의 이들과 다양한 운동 기록들을 비교할 수 있다. 남들보다 저조한 기록이나 성장 속도 등은 올가미가 돼 자신을 옭아맨다. 좋은 기록을 가진 반대의 경우에는 더욱 큰 숫자를 얻기 위한 집착이 생기기도 한다.

비교는 자극을 준다.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하고,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숫자가 만든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 기록이 목적이 되고, 숫자가 가치가 되어선 곤란하다. 단순히 운동과 취미 생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인생에서도 통용된다. 비교를 통한 데이터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으면서 자신에게 알맞은 지향점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더 높은 급여, 더 많은 재산, 더 큰 인기를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숫자를 자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문제다.

2023년 계묘년을 마무리하며 지금껏 살아온 삶도, 달리기도 남들과 비교하며 숫자에만 얽매여 왔던 건 아닌지 뒤돌아본다.

박종진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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