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시를 짓던 금수정(金水亭·강원도 포천군 창수면) 풍경. 〈출처:네이버 블로그 '위즈덤 아이즈 풍경여행'〉 |
조선 전기 문신인 양사언(1517∼1584)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시작되는 유명 시조를 남긴 시인이며, 안평대군·김구·한호와 더불어 조선 전기 4대 명필에 속하는 서예가이다. 특히 그의 초서는 최고로 인정받았다. 금강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해 자신의 호를 '봉래(蓬萊)'라 했다. 양사언은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신분 제한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정식으로 과거에 급제해 평생을 관료로 살았던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는 주로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궁핍한 가운데 시서(詩書)와 거문고를 벗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 중년 이후에는 관동지방의 수령으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었고, 산수를 돌아다니며 도가적 흥취에 몰입하기도 했다.
'태산이 높다하되…' 지은 시조 작가
영평 8경의 명소인 정자 자주 찾아
양사언이 애용한 거문고 '봉래금'
세속 벗어난 천진하고 청아한 시풍
詩는 바위에 새겨 도가적 흥취 몰입
조선 전기 문신인 양사언의 초서. 그의 초서는 최고로 인정받았다. <서강대박물관 소장> |
◆거문고 즐겼던 선풍도골 양사언
성호(星湖) 이익(1629~1690)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양사언에 대해 '신선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면서 '그 글씨 또한 그 인물과 같은데, 사람들이 그 글씨가 진속(塵俗)을 벗어난 줄은 알아도 그 시가 세상 사람의 말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라고 표현하면서 세속을 벗어난 천진하고도 청아한 시풍을 높이 평가했다. 조경(趙絅)이 쓴 양사언의 묘갈명 글에서는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불교를 가까이하였고, 만년에는 선도에 빠졌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를 일러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말하고, 그의 작품은 탈속한 정취가 빼어나다'라고 했다.
양사언은 고향 포천에서 시서와 거문고 등을 벗 삼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예로부터 영평 8경으로 불리는 명소였던 정자, 영평천 가에 있는 금수정(金水亭)을 자주 찾았다. 영평천에는 지금도 바위에 새긴 그의 글씨 '경도(瓊島)'가 남아 있다. 이 글씨의 의미는 '옥 바위섬'이라는 뜻으로, 중국 베이징 북해공원의 호수 안에 있는 섬의 이름이기도 하다. 1546년 문과에 급제, 대동승(大同升)을 거쳐 삼등(三登)현감,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윤 등을 역임한 후 회양(淮陽)군수와 철원군수를 지냈다. 회양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들어가 대자연을 즐겼고,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는 지금도 그가 새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이어서 안변(安邊)군수로 부임했는데, 일을 잘해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양사언은 비상한 천재인 데다가 노력을 더해 읽지 않은 책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40년 동안 다스린 고을은 8군데나 되었는데, 단 한 가지의 부정이 없었고, 처자를 위해 재산을 마련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의 시는 작위(作爲) 없이 천의무봉(天衣無縫)하고 기발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양사언의 거문고 봉래금
양사언이 애용한 거문고는 봉래금(蓬萊琴)이라 불리었다. 그는 자신의 거문고를 허엽(허난설헌 남매의 아버지)의 외손자 박종현(朴宗賢)에게 선물로 주었다. 박종현은 거문고 명인이었다. 실학자 홍대용의 '담헌서' 중 '봉래금사적'에 봉래금 이야기가 나온다.
"첨지(僉知) 박종현은 우리 고조모 박부인의 조고(祖考)이니, 공(公: 첨지공)은 곧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외손이다. 초당은 음을 잘 알고 거문고도 잘 탔다. 공은 늘 곁에 있으면서 가만히 듣곤 하였다. 초당이 일찍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방안에서 밝고 높은 거문고 소리가 들리므로 한참 후에 문을 열고 보니 외손인 첨지공이었다. 이때 그는 나이 아홉 살이었다. 초당은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자기가 배운 바를 모두 전해 주었다. 첨지공은 천부의 재질에다 초당의 가르침을 얻게 되자, 드디어 악(樂)에 있어서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특히 거문고에 정통하였다. 비축한 거문고 중 명기도 많았으니. 봉래금이 그중의 하나다. 공은 일찍이 봉래(蓬萊) 양사언과 거문고 친구가 되어 친히 지냈다. 봉래가 거문고 배에 글 두 편을 적고 지락가(至樂歌)라 했는데, 세상에서 봉래금으로 일컫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공은 죽고 자손은 쇠퇴하여 가업을 지키지 못해 박부인이 봉래금과 단금(短琴) 하나를 집에 간직해 두었는데, 언젠가 말하기를 '내 자손 중에 만일 거문고를 아는 자가 있다면 이를 전해 주겠다'라고 하였다. 중종조(仲從祖) 유수공(留守公)이 초년에 배우다가 중단하고 능히 끝마치지 못하였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
봉래금은 비록 종가에 잘 간직되어 있었건만, 단금은 남에게 빌려 주었다가 잃어버렸다. 괘 좌우에 새긴 오언(五言) 20자는 첨지공의 시와 글씨라 한다. 병자(丙子) 9월에 중종조부께 듣고 기록한다. 양봉래의 글 한 편에 '녹기금 소리는 백아의 마음이요(綠綺琴伯牙心)/ 종자기만이 비로소 그 마음 아네(鍾子始知音)/ 한 곡 탈 때마다 한 수 읊조리니(一鼓複一吟)/ 청량한 허뢰(바람)가 먼 봉우리에서 일어나고(冷冷虛 起遙岑)/ 강에 비친 달은 곱디고우며 강물은 깊어라(江月娟娟江水深)'고 하였다. 또 한 편에는 '영롱한 돌 위의 오동, 한번 치고 한번 읊으매 삼십 년이 봄이로다. 그 옛날 종자기(鍾子期) 나를 버리고 가니, 옥진(玉軫)과 금휘(金徽)에 흰 티끌이 생겼네. 양춘(陽春)과 백설(白雪) 또 광릉산(廣陵散)을 봉래 산수 사람에게 붙여 줄거나'라고 하였다. 이것을 세상에서 모각한 것이 많으나 간혹 진면(眞面)을 어지럽힌 것이 있다. 거문고 품수가 자못 높은데, 큰 것이 더욱 웅혼하여 평조(平調)에 더욱 알맞다. 옛 악사(樂師) 함덕형(咸德亨)이 항상 즐겨 타고 상품이라 일컬었다. 그 후에 속된 악사들은 오직 손에 편리하게 곱고 부드러운 것만 취하고 크고 억센 것을 괴롭게 여겼으니, 조금만 쳐도 손가락이 아프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녹기금 소리는 백아의 마음이요~'라는 시가 양사언이 '증금옹(贈琴翁)'이라는 시다. 양사언이 거문고를 즐겼던 금수정은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546번지, 한탄강 상류(영평천)에 있는 정자이다. 금수정이란 이름은 양사언이 우두정(牛頭亭)이라는 정자의 기존 이름을 금수정으로 고친 이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유지되다가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989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우두정은 세종 때 김명리가 지었는데, 양사언은 김명리의 아들 김윤복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두 사람은 금수정에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원림 문화를 향유했다. 양사언의 시 '증금옹(贈琴翁)'이라는 제목에서 '금옹'은 김윤복을 말한다. 김윤복은 양사언의 장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거문고를 타며 풍류를 즐겼는데, 달이 뜬 밤이면 정자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었다. 지은 시를 석벽에 새기기도 했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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